모든 아빠가 그렇겠지만서도
저 늙은 남자는 기어코 저 어리고 말랑말랑한 여자를 쫓아 지갑을 열러 나간다.
산지 몇 년 되긴 했어도 아직 새것 같은 자전거를 바꿔주러. 그것도 배운지는 얼마 되지도 않아 탄지는 6개월도 되지 않은 자전거를.
단지 바퀴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는 어린 여자의 애교 섞인 푸념에 녹아 의기양양하게.
늙은 여자의 카드를 들고 슬쩍 눈치를 보다 이내 어린 여자 쪽으로 맘이 기울어 팔짱을 꼭 끼고 나가버렸다.
늙은 여자는 체념하고 약속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눈이 온다던데 다행히 눈은 안 오네.
창문을 등에 지고 책을 보고 있는데 카톡이 들어온다.
-거기 눈 안 와?
-몰라. 안 오는 거 같은데.
-자전거 새로 사서 좀 멀리 나왔는데 눈이 엄청나게 오네.
슬쩍 뒤돌아봤는데 눈은 안 온다. 뭔 엄살이야.
한 시간쯤 뒤에 자전거 헬멧 위로 눈이 3센티는 쌓여서는 나란히 나타났다.
신랑과 딸은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흥분되어 있다.
-엄마. 진짜 짱 좋아. 내 자전거 봐봐.
카페 밖 자전거에 그새 눈이 잔뜩 쌓여 있다. 바퀴가 크고 날렵한 게 좋아 보이긴 한다만 기분이 영 그렇다.
갖고 갔던 자전거는 어쨌어.
"응. 그거 팔 수 있냐고 했더니 거기 사장님이 놓고 가라고 하셔서.
거기 놓고 가면 수리해서 고아원에 가져다 주신대네."
좋은 일 해서 칭찬받고 싶단다. 그래 잘했다. 어느 아이는 좀 덜 헌 자전거를 갖게 되겠구나.
무리를 해서 뭘 사는 일은 잘 없는 사람인데 유독 딸아이의 말도 안 되는 부탁에는 쉽게 무너진다.
딸바보 아빠를 만만하게 보는 딸아이가 그나마 본인을 최고~라고 말해주는 그 짧은 순간 때문에.
누구 말대로 나는 이제 잘 알겠다.
왜 늙은 남자들이 젊은 여자에게 비싼 가방을 사주며 뿌듯해하는지.
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 아름다운 가방을 손에 쥐고 숨넘어가게 기뻐하고, 애교 부리고, 안기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뿌듯하고 행복한 것이겠지. 늙은 남자는.
나는 그때마다 묻는다.
내 선물은 뭐 없어?
늙은 여자에게는 동기부여가 안된단다.
아니 왜. 나도 팔짝 뛰며 기뻐할 줄도 알고, 애교도 부리고 안겨줄 텐데~
당장 꺼지란다.
어이! 내가 결혼하자마자 당신 빚과 시댁 빚 갚느라 날려먹은 내 청춘이 몇 년인데 그깟 선물하나 못해주냐.
신랑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당신은 전생에 업보가 많았을 거야. 지금의 성격으로 보아 성질도 괴팍해서. 우리 집안사람들을 통째로 불에 태운 거지.. 아, 연쇄살인범! 뭐 그런 거? 그래서 지금 업보를 갚느라 내 빚과 시댁 빚을 갚고 생활비를 대며 살게 된 거지..."
...............
내가 부디 이번 생에서는 살인을 멈추고 당신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래야 다음 생에서는 좀 편안하게 살려나.
내가 다음 생에서는 당신 딸로 태어나 자전거를 한 10번쯤 바꾸며 곯려줘야 할 텐데.
그래도 한편 바보 같은 소비를 하고 돌아오는 신랑의 행복한 얼굴을 보니 뭐 어쩌겠냐 싶기도 하다.
저렇게 좋아 죽겠다는 딸 옆에 더 좋아 죽겠다는 신랑을 보니 말이다.
어리숙한 딸아이가 오로지 세상에 한 명, 본인 맘대로 할 수 있는 '만만이'가 있다는 점과.
이래저래 삶의 굴곡을 겪은, 어찌 보면 좀 불쌍하기도 한 신랑이 저리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딸아이의 존재.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혹시 운명의 가혹함으로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떠나야 한다면 마지막까지 딸 옆에는 딸아이의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년의 무뚝뚝한 사내는 언제부턴가 그의 모든 삶의 목적이 '딸 기쁘게 해드리기'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술 먹고 들어오면 날 깨워대며 "걱정하지 마라. 니는 내가 책임진다." 멋지게 주정을 했었는데.
요즘엔 자는 딸아이만 깨워대며 "걱정하지 마. 아빠가 끝까지 널 책임질 거다. 아빠만 믿어. 아빠는 니가 전부다."한다.
옆에서 슬쩍 서운해진 나는 "나는?"
".. 니는 좀 니가 알아서 해라. 내가 요즘 힘들다.." 한다.
취기에 하는 솔직한 말일 게다.
신랑은 원래 아이를 싫어했었다. 울며 땡깡 부리는 아이를 보면 부모 몰래 뻥 차고 싶다는 눈이 번쩍 뜨일 막말도 했었다.
결혼 4년 만에 첫아이를 낳고 180도 바뀐 신랑의 부성애에 아직도 놀라며 살고 있다.
아이가 어릴 적 염소똥을 싸며 변비에 힘들어할 땐 손바닥에 아이 똥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었다.
똥도 어쩜 이리 이쁘냐며.
-그렇게 이뻐? 이유가 뭐야?
-이쁘잖아.
-나는?
-니는 못생겼잖아.
-뭔 말이야. 동네 나가면 나랑 딸이랑 똑같이 생겼다며 사람들이 막 웃고 그러던데.
신랑은 진심으로 불쾌해한다. 다시는 그런 말 말라며.
그래 당신은 좋겠다.
가슴 벅차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인생도 걸고, 돈도 쓰며 살 수 있어서.
짝사랑인 게 좀 가슴 아프다만 서도 말 잘 들으면 애교도 떨고 해주니 그 정도로 만족해야겄지.
오늘도 또 술 먹고 늦으신다니 새벽에 들어와선 딸아이를 흔들어 깨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