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 May 15. 2023

학원을 다니는 게 너인지 나인지

아이들의 놀이 엿듣기

"아기들은 키우기가 어려우니까 일단 크면 데려가자!"

"근데 클수록 말을 안 듣는다는 소문 못 들었어?"

"그건 그렇지만..."


위의 대화는 우리 두 아들이 각종 피규어들로 즐기는 역할놀이의 오디오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가만히 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저 꾸러기들이 자기 객관화가 저만큼이나 된다고? 놀라움 다음으로 밀려오는 웃김. 알고 보니 그 놀이의 설정은 포켓몬 피규어들을 돌보는 큐브로 만든 어린이집이 주요 무대였는데, 결론은 애들 키우는 게 힘들어서 집에 나중에 데려간다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의 대화치고는 상당히 핵심을 파악한 내용이긴 한데 뭔가 찝찝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짐정리로 바쁘던 나는 그 놀이를 엿들으며 아이들의 연기톤에 피식피식 웃었다. 실은, 공감하다 못해 하마터면 하던 일 미루고 놀이에 합류할 뻔했다.


"이사를 하니까 좋기도 한데 싫기도 해요. 아파트는 뛸 수가 없잖아요."


자유롭게 뛰면서 살아온 우리 집 아이들에게 아파트로의 이사는 나름 큰 변화였다. 이번 이사로 우리 가족은 대단지 아파트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차로 라이드를 하지 않아도 되고, 놀이터에 언제든 나가 놀아도 누군가 지나다 합류할 만큼 친구들과 오손도손 지낼 수 있는 즐거운 변화임엔 틀림없다. 더불어 본격 학원 스케줄이 짜였다. 나는 홈스쿨링을 약간 내려놓았다. 그래서 진짜(?) 영어학원을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우리 아이들은 요즘 무척 바쁘다. 평일에는 하교 후 놀다가 학원을 가느라 바쁘고, 저녁에는 중간중간 고고카카오, 에그박사, 읽으면서 바로 써먹는 시리즈 등 만화책을 읽으며 저녁을 먹고, 물놀이와 유사한 샤워시간을 갖고, 미미한 학교숙제와 더불어 결코 미미하지 않은 영어숙제를 해야 하는 분주한 일정에 취침시간은 늦어져만 간다. 놀이터에 나가면 자꾸 지나가던 친구들과 모르는 애들의 합류로 몇 시간은 거뜬하게 놀고 들어오는데 숙제시간이 되면 하품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일정 중간중간 따라다닌 40대 엄마의 체력 또한 바닥난 터라 숙제시간은 아무래도 엄마에게 더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대단지라면 다 편해질 것 같았는데 초등학생이 둘로 늘어난 지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길이 없다. 말을 하면서 그대로 졸기까지 내 체력의 바닥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때마다 얄짤없이 나의 팔을 당기는 둘째에게 제법 많은 양의 영어숙제는 아직까지 손가락 아프고 어려운 미션이다.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고 내 일이 줄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둘째는 언젠가 내게 물었다.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왜 자기는 영어를 못하냐고. 넌 어렸고 기관을 다녀본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라고 알려주며 떠오른 과거의 일을 귀띔해 주었다.


"엄마가 미국에서 운동 등록하고 너희들 맡기는 걸 시도했는데 트래드밀 위에 올라가 보지도 못했어. 케어하는 분들이 매번 너네 못 달래겠다고 불러서 락커에 짐도 못 넣어봤단다."


자신이 영어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이유에 머쓱한 건지, 아니면 엄마가 자기를 24시간 품고 있었던 게 만족스러운 건지, 둘째는 헤벌죽 웃어 보였었다. 어쨌든 첫째에 비해 영어를 너무 안 가르친 참이라 둘째에게 찔끔찔끔 파닉스를 가르쳤다. 나름 나의 언어학 전공 배경을 동원해 가르치긴 했지만, 쓰기를 가르치기란 정말 어려웠다. 아이는 엄마가 쓰라는 알파벳을 쓰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일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막냉이 기술을 활용해 칭얼대는 녀석과 지지부진한 진도를 빼다 보니 새삼 첫째가 대체 얼마나 성실한 아이였던가 싶어 고마울 지경이었다. 막내미 뿜뿜 하던 둘째에게도 학습이란 걸 받아들일 시기가 왔다. 이사와 초등학교 입학.


첫째는 전학 와서 초반부터 분위기 파악에 나섰다. 분석적 성향이 있는 아이라 대체로 학습 수준이 이전 학교보다 높다고 느낀 모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 학교에는 공부를 보통 이상으로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평을 내렸다. 하던 애들만 잘했던 이전 학교에 비해 대체로 잘하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아이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도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또래압력(Peer Pressure)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어학원 두 번째 시간을 마치고 돌아와 어쩐지 숙제를 부지런히 시작하는 것에 동의해서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학원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단어 한 개 맞고 다 틀려서 울컥했는지 울었어요, 어머님."

"아..."


첫 단어시험에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알파벳도 아직 그림 그리듯 쓰는데 나름 집에서 했던 학습을 바탕으로 레벨이 실력보다 약간 높게 배정된 탓에 매 수업에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 예상하고는 있었다. 게다가 첫 시험은 스스로 깨달을 필요가 있을 듯해서 억지로 외우라고 하지 않았다. 결국 시험도 더 잘 보고 싶고 레벨을 내려가기는 싫다면서 녀석은 오늘도 꼬부랑글씨로 숙제를 해간다. 학원에서 보상으로 주는 달러를 모아야 다음 마켓데이에서 쇼핑이 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못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긴 하는 모양이다.


둘째는 형아를 따라잡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지금 풀고 있는 워크북을 형아가 여섯 살 때 뗐다는 걸 알고야 말았다. 이제 피아노를 이겨보겠다고 매일 가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제 바이엘 첫 시작인데, 형아는 이미 체르니 치고 있다. 초등학생이 되자 드디어 발현되는 둘째의 경쟁심은 앞으로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학원은 애들이 다니는데 엄마가 너무 곤하다. 학원가방을 메고 지나다니는 엄마들 중 내가 있다. 하교 직후 학원에 바로 간 두 녀석의 가방을 바꿔주고 집에 가져다 두느라 양 어깨에도 매기도 한다. 같은 길을 하루에 몇 번 오가는지 갈수록 기계적이다. 오늘은 폴딩카트를 살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카트에 가방들을 담아 밀고 다니는 엄마들을 몇 봤는데 꽤 합리적인 방법이지 않은가. 그나저나 학원을 다니는 게 너인지 나인지 문득 혼란스러운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각자의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