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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Jun 16. 2023

그네 타는 할아버지

밥만 잘 먹고 똥만 잘 싸도 칭찬받고 싶은 날

대체 나를 누가 그리 쫓아온다고 늘 급한지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걸음을 서둘러 놀이터를 지나는데 한 할아버지가 유모차를 앞에 세워두고 그네를 타고 계셨다. 여느 아이들처럼 신명 나게 180도쯤 휘젓는 스킬은 아니었지만 유모차 안의 손주를 봤다 뻥 뚫린 하늘을 봤다 하며 그네를 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찌릿해 걸음을 늦췄다.


그네와 할아버지의 조합이 왜 그렇게 낯설었을까? 우리는 모두 그네 (혹은 나무를) 탔고, 미끄럼틀 (혹은 언덕)을 미끄러지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거란 건 분명한데 말이다. 나는 전자에 속하지만, 나의 아버지만 해도 후자였으니 그 할아버지는 또한 어릴 적 저렇게 예쁘고 튼튼한 그네를 타볼 일이 없으셨을 가능성이 높다. 색색의 요즘 놀이터엔 집라인마저 있으니 어른인들 타고 싶지 않겠는가?


학원을 마친 아이들과 집에 들어가려다 놀고픈 그 얼굴에 마음이 약해져 놀이터에 풀어놓고 그네에 잠시 앉아있었다. 식사시간 즈음이라 그런지 놀이터는 한적했다. 마침 아는 이도 없고 난 좀 지루했다. 걸어서 뱅글뱅글 돌다가 빈 그네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서 발을 바닥에 밀며 떼고 도약한다. 몸이 높이 올라가자 무서웠다. 아니, 나이와 더불어 겁을 먹었는지 어릴 때보다 더 무서웠다. 세상에 더 무서운 꼴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 이런 걸로도 무섭구나. 어이가 없지만 좀 신날 뻔해서 그네에 더 단단히 의지해 몸을 날려보는데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둘이 머뭇거리며 서성인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았다. 왜 나를 그렇게 보나 싶어 의아한 표정을 마주 던졌다. 두 아이는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해서 나를 빤히 보았다. 난 아마 그네를 더 양껏(?) 타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머리는 잠시 버퍼링이 있고서야 그 시선의 의미를 파악했다.


"아, 타려고?"

"(끄덕)..."


나도 모르게 민망해져서 그네를 양보하고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네를 타던 게 마치 지하철 임산부석이나 노약자석에 앉았던 것처럼 무안할 일은 아닌데 멈칫한 나를 돌아보면 그네라는 놀이기구는 젊음의 전유물일지도 모르겠다. 놀이터는 말 그대로 하면 노는 곳인데 이용연령을 보면 12세까지라고 적혀있긴 하니 확실히 젊다 못해 어린 사람들에게 주어진 공간이다. 그러고 보면 그 중학생들도 이미 놀이터 시공업체가 제시한 이용연령을 벗어난 아이들인 셈이다. 무려 3을 곱해도 내 나이에 다다르지 않는 놀이터 이용연령에 기분이 묘했다. 비켜달라고 말하는 대신 내 코앞에 서서 나를 빙긋 웃음을 머금고 빤히 바라보던 학생들에게 묘하게 불쾌감이 남았다. 이 녀석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 포비아가 있는 걸까? 웃으며 나를 쳐다보던 표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불쾌감이 남은 건 사실이다. 나라면 뭐라고 했을까?


옵션 1. "실례지만 둘이 같이 타고 싶어서 그러는데 자리 좀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옵션 2. "그 타고 계신 그네 말인데요. 저희가 타면 안 될까요?"

옵션 3. "아무래도 놀이터 이용연령에 가까운 저희가 그네를 타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내가 중학생이었다면 저런 옵션 따위 고민도 없이 그냥 타시게(?) 뒀을 것 같지만, 그 아이들이 그 순간에 그네를 안 타면 큰일 날 것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단지라 놀이터가 보통 많은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우리에게는 밥만 잘 먹어도 복스럽다 칭찬받고 똥만 잘 싸도 기특하다 소리 듣던 시절이 있었다. 건강히 잘 살아있으니 충분히 장하다며 받는 칭찬 말이다. 아주 거저 받는 좋은 말이니 그때 미리 맘껏 즐겨둘 걸 그랬다. 난 지금 꽤 괜찮은 사람도, 괜찮은 딸도, 괜찮은 엄마도, 괜찮은 아내도, 괜찮은 친구도 어렵다. 심지어 나는 과연 괜찮은 지구인인가 의심할 지경이니 어쩜 어른 나는 점점 자신에게 박해지는 추세다.


놀이터에서 놀기 위해서는 몸을 써야 한다. 초여름이라고 할 수 있는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땀으로 머리를 감은 듯 축축할 때까지 논다. 튀는 물방울은 물이 아니라 땀이다. 너네 대단하다고 감탄이 터진다. 쉬이 미혹되지 않는다는 나의 나이에는 운동능력도 저하된다. 축구하다가 정말 파열되고 만 남편의 아킬레스건 또한 운동능력 과신이 불러온 결과일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좀 다르다. 오늘의 체력저하는 어제에 비할 것이 아니니 나이 듦은 숫자뿐이 아니긴 하다.


"나이랑 더불어 겁만 는 것 같아. 그네 타는데 이제는 높이 못 올라가겠더라고."


누군가가 이용연령이 높은 놀이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의자 좀 놓고 쉼터라고 부르기보다, 맨손 체조를 위한 운동기구를 늘어놓기보다, 무궁화꽃을 피우고 미끄럼틀과 그네를 탈 수 있는 놀이터를 말이다. 아이들이 와도 어른들이 줄만 서면 마음껏 탈 수 있는, 아이처럼 깔깔거리다 주책이라는 소릴 듣거나 희끗하게 헝클어지는 머리가 우습거나 미안하지 않은 놀이터를 떠올려보았다. 어른에게도 놀이는 좋은 것이다. 막상 애들 하는 놀이 해보면 재밌다니까. 술게임처럼 정신없이 신나는 걸 많이 하고 놀아봐서 아이들 놀이가 시시해 보이겠지만, 어둑한 데서 술게임 할 기운이 없어지고 초록이 좋고 바람이 좋은 나이가 오는 법이다. 그네를 타면  곤한 몸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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