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파트, 하루
단지에 풀어놓은 초등학생들
"엄마, 놀다 와도 돼요?"
"몇 시까지 놀 건데?"
"30분?"
소박하게 내놓은 30분이라는 시간에 쉬이 승낙한 나는 잠시 숨을 돌렸다. 바쁘기도 바쁜 요즘 아이들은 조각난 시간을 활용해 친구들과 논다.
주방에서 싱크대 앞에 서면 빼곡한 아파트뷰를 볼 수 있다. 내려다보면 산책로와 사람들도 보이겠지만 내 눈높이에서는 온통 창문이다. 내 평생 많고 많은 이사를 하며 다양한 위치와 형태의 집에 살아보았지만 주택에 산 시간이 가장 길었던 데다 아파트 중에서도 이만큼 빼곡한 대단지는 처음이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편하면서 통근 거리가 나쁘지 않은 곳을 찾은 결과가 이곳이다.
미국에서야 늘 1층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일부러 찾은 작은 아파트 1층에 살았다. 그 후엔 집안에서도 맘껏 뛰어놀던 단독주택을 떠나 아파트에 이사 온 나의 아이들은 여전히 뛰놀던 집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금방 말을 바꾼다. 친구들과 아파트 동 사이사이와 다양한 놀이터를 오가며 놀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이 훨씬 소중한 탓이다. 나 또한 주택에서 수시로 차를 가지고 아이들을 나르던 것에 비해, 웬만하면 단지 내와 단지 주변을 벗어나지 않고 도보만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지금이 편한 건 사실이다.
이 편리함에 익숙해졌는데도 나는 종종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는 게 어쩐지 안심되고 포근한 날도 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 있다는 게 되려 갑갑하고 쓸쓸한 날도 있다. 이율배반적인 나의 이런 마음을 누군가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휴, 그나마 고층이 아니라 다행이기도 하다. 고층에 가면 어지러운 건 내 어지러움증이 발현되는 건지 자주 안 올라가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이제 둘이 알아서 등교하고, 아파트 상가의 학원 정도는 알아서 간다. 이사차량 외에는 지상에 차가 다니지 않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고 아이들이 돌아다니게 둔다. 그런데 전동킥보드, 자전거, 오토바이, 버스까지 혼재된 아파트 앞 골목길부터는 내가 나선다. 모르는 아이들이 혼자 다녀도 길 건널 때는 아줌마랑 건너자며 챙긴다. 이런 열심은 결국 내가 어릴 적보다 거리를 위험하게 누비는 탈 것이 많아졌다는 사실과 안면도 트지 않은 수많은 이웃들이 촘촘하게 사는 이곳에서 누군가 내 아이를 알아보고 챙겨주길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종종 나라도 예스러운 오지랖을 부려야 하나 싶어 진다. 어제 한 아이가 차가 가까워지는 찻길로 냅다 들어서는 모습에 놀란 나는 아이 어깨를 살짝 끌어당겼다. "아줌마랑 같이 건널까?" 놀랐을까 봐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내 손을 덥석 잡고 안심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인사드려야지."
"인사했니?"
"인사는?"
인사 잘하는 아이는 눈에 딱 들어온다. 보통 인사 잘하는 아이들이 다른 부분에서도 괜찮더라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인사 잘 안 하는 애들 틈에 몇 인사 잘하는 애들은 예뻐서 제일 눈에 와 박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인사봇(!)으로 키우고 있다. 어딘가 들고 날 때,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아파트 단지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마주칠 때 말고도 친구 옆에 어른이 계시면 처음 뵙더라도 인사를 하라고 말하는 인사집착맘이다. 기본만 해도 눈에 띄는 세상이면 인사만 잘해도 큰 장점 아닌가. 내가 느낀 아파트 생활은 어쩌면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단체생활 같다. 때로는 함께라 든든하고, 때로는 바글거림이 힘들기도 한 시간. 당장 내일은 그 덕에 커뮤니티 수업에 운동하러 가니까 현생에 집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