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몸을 즐기는 법
- 종이 수집가
여행하다 리플렛이며 홍보 전단 같은 작고 조각난 것들을 보면 다른 나라 언어는 읽을 줄도 모르면서 가방 가득 모아온다. 어찌 보면 쓰레기 수집가 같은 궁상스러운 짓이다. 근데 대놓고 이런 수집벽을 자랑하는 책이 『종이의 신 이야기』(오다이라 가즈에, 책읽는수요일, 2017) 이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어로 종이는 ‘가미’인데 신(神)도 ‘가미’라고 한다. 이름이 같게 불리는 걸 보면 일본에서는 종이에 대해 특별한 정서가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종이의 신 이야기』는 종이와 관련한 사람들을 취재한 것으로 대화는 주로 ‘어떤 종이를 좋아하십니까?’로 시작된다. 까칠하고 티가 들어간 종이를 좋아하는 사람, 라벨지를 좋아하는 사람, 소포 종이, 쇼핑백 종이 등 많은 종이가 등장한다.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을 수 있는 문화란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고 유통되고 퇴적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종이 하나로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읽고 있노라면 ‘저도 좋아하는 종이가 있습니다만’ 이라고 나도 끼어들어 내가 수집한 종이를 꺼내 놓고 싶어진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종이를 생산하는 큰 기업들이 많다. 일전에 실크스크린 달력을 위해 종이가 필요해 D페이퍼에 문의했더니 수십 권의 종이 샘플북을 가져다줘서 깜짝 놀랐다. 영업사원이 두 손 가득 들고 온 샘플은 부피만 해도 설날 선물용 사과상자 크기로 두 박스는 될 듯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거대해진 종이의 세계라니! 샘플 북을 하나하나 펴보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기억하기 힘든 많은 종이들 중에 자연스러운 티끌이 군데 군데 들어간 '플로라', 커피컵 종이 용지를 재생했다는 '커피', 견고하면서도 광택이없이 수수한 '크리에이티브보드', 코팅되지 않은 맛을 잘살린'아라벨'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요즘의 수요에 맞게 자연재료인 엽록소, 코튼, 대마, 밀 등을 사용한 종이들은 채식을 좋아하는 내가 냠냠 먹고 싶을 정도였다.
명색이 디자이너라면서 매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서 ‘이 색이 좋을까?’ ‘위치를 좀 옮겨볼까?’ ‘저 서체가 나을 것 같다.’ 등 표면적인 고민만 했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그래픽 디자인의 마지막 종착지, 종이에 대해서는 습관적인 무지와 안일함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제 디자이너여! 모니터 앞을 떠나 두 손을 비빈 다음에 손끝을 날 세워 느껴보기를 권한다. 내용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 주기위해 깐깐하고 예민한 감각을 발휘해야한다. 시각은 잠시 뒤로 보내고 촉각과 후각, 청각을 살려보자, 까츨함과 푹신함, 종이가 넘어갈때 내는 파라락 소리, 자연의 티끌에서 풍겨나오는 냄새까지 정교하게 배치해 줄 디자이너가 진짜다. 책의 격은 바로 종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