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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r 05. 2022

쟁여두는 마음

책의 몸을 즐기는 법

- 쟁여두는 마음

나도 읽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다.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마법』(더난출판사, 2012). 그 외도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근데 정리 후에도 집은 큰 변화가 없었다. 옷이나 인형이나, 그릇이나, 자질구레한 장식품 같은 것들을 아무리 내다 놓아도 집이 넓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책이었다. 거실에도 가득하고, 안방에도 가득하고 온갖 빈틈을 점유한 책 때문이다. 아이들 책도 얼마나 많이 사들였던가.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그 책들을 일말의 미련도 없이 거실에 내놓고, 책장에는 인형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 친구들의 선물로 채웠다. 


우리 집에서 책을 좋아하는 것은 나 하나이다. 대부분이 내 책이다. 아이들을 위해 샀지만 아이들이 읽지 않으니 그것도 내 책에 포함된다. 남편은 티브이와 리모컨 하나면 일 년 내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이 죽으면 관에 만능리모컨을 넣어달라고, 귀신 되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티브이 시청하시겠단다. 얼마나 심플한 삶인지. 나도 단출한 삶에 가까워지고자 - 특히나 요즘은 덜어내는 삶이 트렌드가 아니던가 - 이사할 때마다 책장 앞에 서서 버리고 말겠다는 비장함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지만, 어느새 쪼그려 앉아 버리려고 가려낸 책들을 읽고 있다. 


그나마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3D 맥스 등 목적에 충실한 책들은 용도가 다함과 동시에 - 책이 미적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 미련없이 버릴 수 있다. 소설이나 에세이, 자기계발서 등은 몇 권이라도 정리하지만 한 권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역시 전공 서적들이다. 전공이라 하면 디자인이니 뭐 그리 책이 많겠느냐고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면 디자인이야말로 세상의 거의 모든 인공물을 망라하는 거대한 분야라는 걸 알게 된다. 인공물은 인간의 창조물이고, 문명이고, 디자인 그 자체며 삶이다. 그런 연유로 철학, 과학, 심리학, 역사, 뇌과학, 명리학까지 책장에 들어차게 되었다. 그 제목들을 읽고 있으면 지적 욕망이 충족되는 용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므로 가방 끈 긴 자의 책장은 줄어들지 못한다.



근래 몇 년간은 탐나는 책들이 너무 많아 일단 쟁여두자는 마음이 발동하여 사들이다 보니 읽지 못한 새 책들이 대기열에서 늙어가고 있다. 처음엔 당장에라도 읽을 듯이 책상 위에서 대기하다가 몇 주가 지나면 가장 가까운 책장의 열에 꽂히고 그 다음은 잊혀진다. 


서점에 신간이 입고되어 겪게 되는 순서와도 같은 일이 나의 집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집이 책으로 가득 차니 가족들도 정리 좀 하는게 어떠냐고 넌지시 찌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늙어서 다리도 아프고 어디 부르는 곳도 없으면 그때 읽으려고 비축해 두는 거야’ 라고 한다. 말하자면 나의 노후 대책인 셈이다. 책은 읽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보험도 대비책이지 꼭 보험금 타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난 ‘어쩌면’ 이라는 보험의 기능처럼 책을 저축한다. 그것은 ‘읽어야 할 것’이 아니고 ‘읽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르고’에 해당하는 대상이다.


여러분은 읽지 않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계세요? 전 대략 마흔 권은 될듯 하네요. 서가 앞에서 책 제목을 읽어 내려갈 때는 든든하고 즐거운데 생이 끝나기 전에 미처 못 읽고 버려지거나 처분해야할 대상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약간은 무섭네요, 후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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