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몸을 즐기는 법
특수 가공인 ‘박’은 원래가 복식과 직물에 금의 화려함을 더하여 장식성을 가미하는 섬유공예 기술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금박의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나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한복집을 경영하셨다. 1980년대 즈음은 한복에도 금박이 일반적인 장식적 기법이었다. 지금은 자수나 날염이 주된 장식법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마네킹은 아랫단과 소매가 금박으로 장식된 번쩍번쩍한 한복을 걸치고 있었다. 가끔 어머니를 도와 쇼윈도를 꼼꼼히 닦고 나면 금박은 더욱 빛을 발했다. 부족한 염색 기술을 금박으로 보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고 화려한 것이란 게 문화의 미성숙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개발도상국이었던 그때에는 화장도 화려했고 의상도 화려했다. 생각해보면 솔직하고 원색적인 매력이 있었다.
인쇄도 그 시절엔 금박을 많이 썼다. 하얀색의 종이에 회사의 심벌 마크는 금박을 깊이 눌러 박는 것이 명함의 기본형이었다. 명함을 쓰는 직업도 많지 않았을 때지만 말이다. 박은 인쇄 후에 이루어지는 후가공이다. CMYK 옵셋 인쇄로 찍을 수 있는 색이 아니라 박은 물질적 요소다. 잉크의 인쇄가 끝난 후에 박 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서 작업을 한다. 색에서도 금색은 색이라기보다 물질이다.
근래 들어 책의 표지에도 박을 많이 사용한다. 표지의 색을 줄이고 타이포나 단순한 아트웍이 주류가 되면서 금박이 포인트 기법으로 사용된다. 박의 종류도 금박, 은박은 기본이고, 적, 청, 녹, 먹, 로즈골드뿐만 아니라 홀로그램과 같이 무지갯빛 광채를 띠는 것까지 존재한다.
단순한 표지 디자인에 포인트로 쓰인 박은 책의 품위를 올려주고 빛에 따라 변하는 역동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느다란 띠 형태의 색 면에 박을 쓰면 수공예 맛도 나고, 고급스러워진다. 귀걸이나 목걸이를 착용하고 외출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작은 반짝임이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분석적인 자세로 눈을 가늘게 뜨고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하는 섬세한 배치다. 요즘 말로 꾸안꾸의 매력의 비법이다.
박 외에 형압이나 에폭시 코팅도 좋은 후가공 기법이다. 글자나 문양에 사용하면 독특한 시각적 효과와 더불어 촉각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시선을 붙잡고 우리의 손을 끌어당겨 표면을 더듬게 만든다. 쇼핑에도 눈으로만 보는 자 보다는 손으로 만져보는 자가 구매할 확률이 높다. 일단 고객의 눈에 띄고 만져보고 싶게 만들면 반은 성공한 셈이다. 모든 가공법은 다른 것들에 비해 차별성을 두고 촉각적 요소를 발발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디테일을 중요시하는 요즘에는 색보다 가공법에 디자인의 노하우가 표출된다.
하지만 만약 모든 책이 박을 사용한다면 그때는 박을 없애는 것이 눈에 띄는 방법이다. 희귀한 것은 우선적 가치가 있다. 새롭다는 것도 희귀함의 유의어다. 희귀하다는 것은 지금 나와 있는 것들을 다 알고 있는 넓고도 깊은 안목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의미로,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 라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칸트의 미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미적 경험은 상상한 것을 넘어서 있을 때, 즉 새로운 것이 감각으로 포섭되었을 때 일어난다. 이런 미적 감수성을 최대한 활용하면 강력한 디자인이 된다. 마케팅을 위한 디자인으로서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구매에 기여하는 자본주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디자인의 운명이 가끔은 서글프다. 미의 양면성이라고나 할까. 예술과 마케팅의 부분에서는 할 말이 많지만 다음 기회에 풀어보겠다.
구매를 자극하는 사물의 미적 충동보다 일상의 고유성에 집중하면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