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몸을 즐기는 법
지면이나 오브제 위에 인쇄된 잉크는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2차원의 평면으로 여겨지는 지면도 엄연한 3차원의 입체다. 따라서 지면에는 음영이 지고, 활자에는 깊이가 있는 법.
같은 크기의 판형에 같은 크기의 서체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디지털 인쇄냐, 옵셋 인쇄냐, 리소 인쇄냐에 따라 메세지는 다르다. "사랑해" 라는 한마디가 질척거리게도, 무심하게도, 쿨하게도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글자를 만져보고 싶을 때가 있다. 글자로인해 지면에 다른 음영이 생길 때 나는 손끝의 감각을 세워 더듬어 본다. 지면에 살짝 솟아 있거나, 들어가 있거나, 페이면서 솟아 있다. 옵셋 인쇄 이전의 활판 인쇄는 금속 낱자들에 잉크를 발라 종이에 찍는다. 따라서 자국이 생기고 잉크가 홈을 적시면서 종이에 새겨진다.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서약하듯 영원히 퇴색되지 않을 것 같은 종이와 잉크의 결합이다. 종이가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글자가 빛바래는 일 따위는 없다. 그래서 청첩장에는 역시 글자가 돋아 올라오는 인쇄법이나 진하고 진한 잉크자국이 있어야 제대로다.
이에 반해 출력된 책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램이 생기고 다소 긴 시간이 흐르면 종이로부터 휘발되어 자취를 감춘다. 일전에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불탄 적 있었는데, 그때 종이책은 모두 소실되었지만, 점토는 살아남아서 오천 년 전의 역사가 밝혀질 수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현대의 책은 화재가 일어나지 않아도 책의 내용이 저절로 사라질 운명이다. 과거의 양피지 책을 거쳐 활판인쇄, 석판 인쇄, 옵셋인쇄 그리고 현재의 잉크분사식 인쇄 까지 글들은 몸무게를 줄이면서 깊이나 솟아남도 줄어들었다. 인쇄의 반감기가 확연히 빨라져 버렸다.
'더 빠르게'를 성취하는 대신 '더 오래'를 포기하고 있다.
종이의 수명만큼도 지속되지 못하는 현대의 인쇄물은 급기야 디지털 매체속, 차가운 모니터 위로 빛으로 이전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제 메세지는 확연히 달라졌다. 영원토록 맹세하는 "사랑해" 따위는 없다. 카카오톡 대화창에 "사랑해"라는 문장을 쓰면 그 문장이 화면위로 사라지는 동시에 그것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 문장이 화면위에 머무는 그 동안만 유효한 것이다. 대화창의 스크롤을 밀어 지나간 문장들을 찾아보지만, 왠지 서글프고 쿨하지 못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수가 없다.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이전하는 것 처럼 빛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물성, 즉 몸을 떠나고 있다. 우리가 몸이 없다면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약속도 미래도 예측도 찰라속에 잠시 있었을 뿐. 잊지 않고 지켜야할 약속, 과거를 어디에 어떤 식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안타까움으로 종종 보수동 중고책방에 들른다. 거기에 가면 근대에 발간된 활판 인쇄물을 만날 수 있다. 귀퉁이가 낡아지고 바스러졌지만 글자는 여전히 진지하다. 물성 있는, 만질 수 있는 활자를 손으로 더듬을 때 어떤 안도감이 가슴에 번진다. 낡아도 선명한 단어들의 오래된 언술, 진지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글의 힘을 믿게된다.
*반감기란 불안정한 물질이 소멸되는 과정중에 50%만 남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세월이 갈수록 훼손되는 기록물의 경우도 반감기로 소멸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