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몸을 즐기는 법
미술학도라면 종이에도 앞뒤가 있다는 것을 안다. 조금 더 매끈한 곳이 있고 조금 더 거친 곳이 있다. 입시미술 시절, 푸른 형광등 빛 아래서 도화지의 앞뒤를 뒤집어 보며 그림 그릴 면을 찾곤 했다. 나는 거친 면에 소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연필의 석연이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며 더 풍부하게 묻기 때문이다.
지금도 책을 만나면 내지를 펼쳐 ‘이건 문캔인가? 쫀쫀한거 보니 몽블랑이겠네.’ 라며 종이 앞뒤를 살핀다. 도공지-아트지처럼 표면처리를 한 종이-는 얇아도 무게가 더 많이 나간다. 예전엔 잡지들은 대부분이 사진과 그림이 많이 실렸기 때문에 발색이 좋고 가격이 저렴한 아트지나 스노우지를 많이 썼다. 하지만 색감이 잘 나와도 빛에 따라 눈부심이 심하고, 색채의 대비가 심해서 고급스러운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은 매거진들도 다양한 종이를 사용한다. 새해에 구매한 《월간 디자인》(2021.2월호,디자인하우스)을 보더라도 표지 바깥쪽은 아이보리지 300그램평량을 코팅처리하여 발색을 최대한 살렸지만 표지 안쪽은 오히려 더욱 거친 느낌의 날것으로 두어 둘의 대비를 극대화하였다. 내지는 매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광택이 도는 뉴플러스 100그램과 표면이 더 폭신하고 자연스러운 그린라이트 100그램을 섞어서 사용했다. 표지의 두껍고 매끈한 느낌이 뉴플러스로 완충되고 내지로 이어지는 내추럴한 그린라이트는 잡지의 풍미를 높여준다. 하나의 종이보다 두 가지 이상의 종이를 쓰면 책이 더 맛있어진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도인처럼 책은 어쩌면 손으로 먹는 매체다. 다양한 질감을 만나면 기사가 다채롭고 내용이 풍부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책을 제작할 때 여러 종이를 사용하고 싶으면 인쇄소에 문의해서 전지 한 장에 들어가는 페이지 수를 잘 계산해서 배치하면 된다(보통 국판A5일때 32페이지가 전지 한 장에 해당된다).
나는 일전에 책을 제작할 때 그린라이트 100그램을 사용했다. 원고를 교정교열하면서 미리 그린라이트로 미리 인쇄해 보고 결정했다. 그린라이트는 20% 재생지를 포함한 종이다. 친환경에 조금 가까이 갈 수 있어 세상에 쓰레기를 만드는 일에 죄책감을 덜 수 있기도 했고 책이 가볍고 눈부심이 없고 편안했다. 결정적으로 그린라이트는 평량에 비해 종이 두께가 두꺼워서 책등을 두툼하게 만들고 싶을 때 사용하면 200페이지의 책이라도 250페이지의 두께를 만들수 있다!
저는 후각이 둔해서 그런지 음식의 맛보다 질감을 즐기면서 먹어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식감이 왁자지껄한 음식이 좋아요. 질기고 바삭바삭하고 뭉텅하고 쫄깃하고 미끈한 것들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질겅질겅 먹으면 맛있더라구요. 보기에는 좀 좋지 않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