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nner Nov 17. 2020

커피 식성이 까다로운 편입니다

주 종목은 아메리카노와 콜드브루, 핸드드립.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가던 동네 카페의 커피 맛이 변했다. 접근성이 좋아서 자주 들렀던 것뿐 맛있어서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전에는 이렇게 한 모금 마시자마자 기분이 찜찜해지는 쓴(탄) 맛이 나진 않았다. 커피 맛이 변한 건 한 달여 전부터다. 여느 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평소와 다르게 너무 맛이 없었다. 처음엔 추출에 실수가 있었던 거라 생각하고 넘겼으나 그다음 주에 같은 메뉴를 시켰을 때에도 맛은 여전했다. 그 다음번에 마신 핫 아메리카노도, 추출법이 다르니 조금 나을까 싶어서 주문한 콜드브루도 모두 실패했다. 


 ‘이번 주는 다르겠지’ 하면서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거듭하자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나름대로 원두의 맛과 품질을 강조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인데, 왜 이렇게도 맛이 없어진 것일까? 아메리카노야 아르바이트생의 추출이 미숙한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사에서 원액을 만들어 공급할 터인 콜드브루까지 맛이 없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두 공급 품질관리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아니면 어쩌다 좀 맛없게 볶아진 원두가 사용된 것뿐이려나? 이 가게 직원분들은 커피 맛이 없어진 걸 알고는 있는 건가? 의문이 머릿속을 한가득 메웠지만 내겐 그걸 카페 직원에게 직접 문의해서 해소할 만큼의 적극성이나 붙임성이 없었다. 그냥 조용히 혼자서, 다음 주부터는 다른 카페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이런 내 고민과 결심이 무색하게 그 카페에는 시종 손님들이 많았다. 사회적 거리두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기야 카페에서 커피 말고 차나 에이드를 마시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우유와 시럽이 들어간 라테 종류를 마시면 이전과 달라진 점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나처럼 아메리카노나 콜드브루를 주로 마시는 사람이더라도 나만큼 커피맛에 민감하게 구는 경우가 드물기도 할 테다.




 나도 처음부터 커피 맛에 예민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까지는 아메리카노를 그저 ‘쓴 물’ 정도로 생각했다. 과제나 시험 준비로 카페인이 필요할 때나 카페를 이용해야 할 때에는 지출을 아끼기 위해 마시는 가장 저렴한 수단이었다(에스프레소는 도저히 못 마시겠어서 논외). 또 다른 이유 한 가지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어른의 맛’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TMI. 지금은 에스프레소도 잘 마시지만 웬만큼 실력 있는 곳이 아니면 맛이 없기 때문에 거의 시도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나에게 커피는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어른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교육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써 놓은 현수막 문구를 보았다. 뭔가 새로운 걸 배워보고 싶던 차에 커피 추출과 바리스타에 대한 흥미가 생겨났다. 며칠 후, 엄마도 귀가 중 그 가게를 보고서는 나에게 커피를 배워보라고 제안했다. 수강료는 엄마가 지불해 주는 대신에 앞으로 나는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엄마가 마실 커피를 내려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커피 수업을 받기 시작한 나는 첫날부터 엄청난 양의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다. 아담한 체구에 인자한 미소를 가진 중년 여성 바리스타 선생님은 맛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많이 마셔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케냐,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등 온갖 산지의 원두로 내린 커피를 다 마셔보게 했다. 그날 처음으로 카페인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다음 시간엔 추출 온도에 따른 맛의 차이, 추출법에 따른 맛의 차이를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커피 맛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더니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드는 맛과 그렇지 않은 맛의 구분도 가능해졌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히어로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이 잠재되어 있던 비범한 능력을 어느 순간 깨우치듯이, 미각을 각성한 나는 커피를 마실 때 ‘맛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카페인에 대한 내성도 덤으로 생겼다(과연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후 커피는 나에게 완전한 기호식품이 됐다. 다양한 카페에 가서 커피 맛을 음미하기를 반복하며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커피 식성이 까다롭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나는 늘 ‘맛있는 커피’에 굶주린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슬프게도 약 1년 전 직장을 옮긴 후 가까운 행동반경에는 내 취향에 딱 맞는 카페가 없다. 가끔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멀리 나갔다 오기도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날은 사무실에 비치된 캡슐 커피를 애용 중이다. 분쇄된 지 시간이 오래 지나서 향과 맛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마실 만 하다. 이렇다 보니 휴일에 어딘가 나가게 되면 그 근처에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찾아내느라 바쁘다. 요즘 인기 있는 카페 중에선 커피맛은 별로여도 인테리어나 베이커리, 디저트 등으로 유명한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커피 맛의 차이를 몰랐던 때로, 어떤 커피를 마시든 다 비슷하게 여기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가 생각해 보면 그건 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이 주는 충족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서 나에게 꼭 맞는 커피를 내리는 카페를 발견했을 때, 우연히 찾아간 카페의 커피가 무척 맛있을 때의 기쁨은 몇 안 되는 삶의 낙 중에 하나다.


커피가 맛있는 데다가 훌륭한 디저트까지 함께 있는 카페를 발견하면 정말 기쁘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는 고소한 맛과 산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밸런스 좋은 커피다. 로스팅한 원두 봉투에 쓰여 있는 '카라멜, 다크 초콜릿, 아몬드, ...' 등의 컵노트의 느낌들이 입 안에서 맴돈다. 또 맛있는 커피에서는 부드러운 감칠맛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여하튼 그렇다. 카페 취향도 따로 있다. 물론 맛있으면 다 좋긴 하지만 이왕이면 대기업형 카페보다는 개인이 소소하게 로스팅을 직접 하는 카페를 선호한다. 소소하게 시작해서 기업을 일군 카페도 좋아한다. 카페 사업에 실패한 자로서 사장님이 매우 존경스럽다.


 이렇게 글로 커피에 대한 추억들과 취향을 정리해 보니 감회가 새롭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커피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동력을 주는 자원' 인 것 같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카페인 주입!), 정서적으로도 커피에 대해서 배우고 싶고 맛있는 곳을 찾아가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하며 나를 움직이게 한다. 어떤 곳이 나에게 맞을까 살펴보고 찾아가는 과정이 때론 귀찮기도 하지만 싫지는 않다. 게으른 내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카페를 찾아다니는 정도라면, 오히려 상당히 즐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평소 좋아하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지, 새로운 커피 맛집을 찾아 나서 볼 것인지 고민해 봐야겠다.



*커피를 좋아하는 브런치 작가님들의 매거진 참여를 기다립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coffeelove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