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몸과 걷는 시체(좀비)
「잘린 머리들」은 찢긴 살점의 역사, 성-속(聖-俗)한 ‘정치적 몸’에 대한 글을 목표로 한다. 죽음과 매개 없이 접촉하는 ‘몸’에 대한 성찰이 ‘주체’를 문제시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주체란 주권·폭력·권력의 이율배반적 삼위일체를 뒤집어쓴 모호하고도 강력한 정치 개념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몸을 교차하지만, 유기체의 정돈된 몸은 아니다. 절단되고 어딘가 구겨진 퇴락한 신체는 곧 고기가 된다. 이것보다 정치적 몸과 가까운 이미지가 또 있을까. 「잘린 머리들」 행간에 ‘살점’이 묻혀 있고 그곳에 은폐된 주검들, 주체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아래서 생생하게 걷고 있지 않은가? 죽음이 주체를 걷게 한다.
신화-역사의 몽타주가 새롭게 연출되길 바란다. 하지만 서툰 솜씨로 엮어질 이미지들은 독자에게 망설임을 가져다줄 것이다. 독서의 진척 가운데 하나의 이미지가 조금의 도움이 된다면, 글의 근본 모티프를 밝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케팔로포어(Cephalophore) ‘머리를 나르는 자’이다. 정치적 몸이 역사에 기록되길, 그 모양새는 다르지만, 그들이 걷는 시체(좀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국민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
단두대에 오른 그의 얼굴은 초췌하게 굳어있다. 사형집행관이 윗옷을 벗으라 했다. 순간 왕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도 붉어졌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을 내리칠 때도 그렇게 붉지는 않을 것이다. 옷을 함부로 벗는 것은 그에게 치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모든 절차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결국 스스로 코트를 벗는다. 재판에서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왕은 목이 달아나는 순간까지 초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단두대 위에서 자신의 무고를 밝힌다. 왕은 죄 없이 죽음에 이른다.
왕의 죄는 마치 원죄처럼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률 없는 법’에 의거하며 그것은 신의 통치를 뜻하는 이성(ratio)에서 연원한다.
세속법 안에서의 죄는 여하에 따라 죄 지음과 죄 사함이 가능하다. 그러나 보편적 몸으로서의 왕은 세속의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법의 예외공간이다.
주권의 원리는 이렇듯 법의 예외공간에 놓이면서도 세속공간을 침투한다. 유한한 지상의 피조물로서의 세속적(자연적) 몸과 은총과 신비의 현현인 보편적(신성한) 몸으로 구분된다. 신법과 지상법을 몸으로 체현하는 주권자는 두 가지 신체를 가짐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주권자가 피고가 된다는 건 하나의 스캔들이다.
“루이는 피고가 아닙니다.”
"루이 16세의 재판이라고요? 여기서 개시해야 할 재판이란 없습니다. 도대체 그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 프레시안북, 2009)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루이를 법정에 회부하기 거부함으로써 세속법에 환원되지 않는 왕의 ‘신성한 몸’을 드러낸다. 여기서 혁명가의 “루이는 피고가 아닙니다.”라는 발화와 국왕의 “국민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정치적 적들은 하나의 주권에 관한 공통지반을 공유하고 있다. 둘은 정치적 몸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미지, 즉 왕의 두 신체를 은연중에 보여준다. 주권을 행사하는 자는 세속의 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왕은 통치는 섭리와 실정법의 중개적 정의를 구현한다. 국왕이 피고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살점이 성(聖)과 속(俗)을 동시에 표지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전통은 현대 헌법 속에도 남아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야 그는 피고로 재판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그처럼 늘 불안에 떨어야 하고 혹은 무서운 악몽으로 고통받는 왕은 다시 없을 것이다."
안개에 굴절된 성스러운 빛이 신비로운 자태를 내보이며 숲속 곳곳에 산란해 있다. 영광이 하늘을 아스라이 덮었고 ‘디아나의 거울’이라 불린 환상의 호수는 그 광채로 인해 불투명해 보인다. 한 그루의 나무가 우뚝 솟아 신성한 ‘네미의 숲’을 받들고 있다. 성소(聖所)를 덮은 안개가 스산한 장막처럼 앉아 있다. 오직 자격 있는 자만이 이곳에 침입할 수 있고 마치 도굴꾼처럼 영광을 탈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엔 큰 칼을 든 살인자가 항상 지켜 서 있다. 신성을 보위하고 대리하는 이 살인자는 숲의 사제이자 ‘숲의 왕’이다. 손에 쥔 칼이 침입자와 숲의 왕 자신의 운명을 암시한다. 신성은 살의로 이어지고, 영광의 왕의 몸은 곧 살인 당할 신체가 된다. 이 성소의 규칙에 따르면 왕이 되고자 하는 그 누구든 기존 왕(사제)을 살해야 한다. 자신을 죽일 더 강하고 교활한 적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왕의 임무이자 운명이다. ‘황금가지’는 노예만이 꺾을 수 있도록 허용되어 숲의 왕과 결투를 벌인다. 왕은 노예였고, 살인자이며 죽음을 체득한 걷는 신체다. 통치권은 이 악몽의 숲에서 고통받는 왕의 몫(목)이자 살육당할 신성한 신체의 꿈이다.
신화란 정당화된 통치에 대한 꿈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서술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잔혹한 살점, 어느 하나 온전치 못한 채 ‘십창’난 살들의 역사다. 신화는 살점들로 엮어졌다. 꿈-신화는 언어 이전의 이야기로 문명이 꿈속에 남겨놓은 성스럽고도 속된 폭력의 시다. 세계에 치세(治世)가 이어지는 동안 엮어진 살점들은 그 아래에 썩지 않고 묻혀있다. 절단된 살점은 신화의 은폐된 토대를 이룬다.
신화에 내재된 폭력 구조는 영웅서사의 여성-괴물 살해와 관련이 깊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영웅인 페르세우스·헤크라클레스·벨레폰·오이디푸스는 여성-과물들을 살해함으로써 불멸의 입지를 얻게 된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부권신화(남근신화)로 읽는 프로이트적 독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경우 어머니-괴물 살해의 부재의 신화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책을 참고하길 바란다. (장-조제프 구, 『철학자 오이디푸스』, 도서출판b, 2016년)
고르곤(메두사), 키마이라, 스핑크스, 히드라, 라돈 등 여성-괴물은 신화적 계보 안에서 친족 관계이다. 모두 ‘모든 괴물의 어머니’이자 뱀-여자인 에키드나의 딸들이다. 그리스의 영웅들은 이 무시무시한 여성-괴물을 도륙 내면서 ‘시련’을 통과하게 된다. 폭력의 서사구조는 영웅신화의 통과의례뿐만 아니라 신화 전반에 걸쳐 스며들어 있다. 사실상 그리스 신화는 가이아(어머니-여신)와 올림포스 주신(主神) 사이의 전쟁이다. 올림포스와 살육전을 벌였던 괴물들은 모두 가이아의 의지이자 아이들이다.
아폴로도로스의 의하면 ‘모든 괴물의 어머니’인 에키드나는 가이아와 타르타로스의 자식이라고 전해진다.
‘위대한 어머니 여신’과 남성 가부장 신의 전쟁은 그리스신화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바빌로니아 신화에도 나타난다. 특히 바빌로나이 신화는 ‘어머니여신’ 살해의 극단적인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어머니-여신을 찢어발겨 그 육신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그것이 바빌로니아 신화의 창세기다. 코스모스 근본적으로 어머니-세계로부터의 폭력적인 절단을 요구한다.
공포스러운 동물인 용이나 메두사와 대결하는 전투에서 영웅은 자신의 남성성을 발전시키며, 자신의 유아적인 의존성을 전투적이고 집중된 남성성으로 변모시키는 내부의 에너지를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형적인 영웅 신화 속에서, 계략만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도 여자 괴물에 대한 승리가 결정되는 것이다.(장-조제프 구, 『철학자 오이디푸스』, 도서출판b, 2016년
신화-폭력을 탈취하라!
“백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들은 머리 없는 몸을 향유한 자들이 다시금 백개의 머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몸을 십할하던 하나의 머리가 없어 진 자리에는 통제할 수 없이 많은 머리들이 자라날 것입니다. 여자라는 질서 외에도 나를 구성할 배치도는 여럿일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백개의 머리 를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김민주, 『히스테리안4: 십창년』, 「자라나다」, 히스테리안, 2020)
신화가 인간의 잠재의식과 인식구조를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다면 우리의 작당 모의는 ‘서사적 인류학’을 도모하는 것이다. 신화-텍스트를 다시 이야기하고, 읽어내어 새로운 상상을 얻어 내는 것이 『히스테리안: 십할년』(이하 ‘십할년’)의 하나의 방향이다. 인간 문명의 장대한 역사를 시원적으로 담고 있는 신화를 마치 도굴꾼처럼 제멋대로 파내고 훼손하고 ‘전유’하고자 한다.
대안적 상상력으로 창세기를 재탈취하여 또 하나의 묵시록적 외경을 만들어낸 것은 강정아의 「에피소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강정아, 『히스테리안4: 십창년』, 「에피소드」, 히스테리안, 2020)
메두사는 기어코 페르세우스의 목을 취했어야 했을까?
"그렇다"
정치적 수행-발화는 무대 언어로서 선포되는 것으로 목이 없는 신체들의 침묵, 백 개의 머리가 달린 비정상 괴물의 몸짓이다. 처음부터 합리성의 요구가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을 구성하는 길을 피하고자 한다. 비합리적인 것은 폭력이란 낙인 세례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라면.
올림포스 ‘식민 신화’ 이전 메두사는 대지의 여신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전승된 (올림포스)그리스 신화는 “강간과 저주 살인은 기억되지 않고, 표독한 괴물이라는 상징”의 메두사를 기억한다. 이 자리에서 올림포스 신화가 ‘식민 신화’라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신화가 성속(聖-俗)한 폭력의 구조를 은폐하는 정상성의 체계를 틀 잡았다고 해야만 할까. 폭력을 조건 없이 소거하는 일은 폭력의 신비화, 즉 터부시다.
더 이상 사유될 것이 없는 비이성의 영역에 폭력을 은폐한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 비판은 자기 몸을 처분할 수밖에 없는 이들로부터 자기방어로서의 폭력을 합리적으로 빼앗는다. 체계가 승인하는 한도 내의 폭력.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말하기. 이러한 항거는 구조적·상징적·객관적 폭력이 가하는 압력을 압도하지 못한다. 충분하지 못한 것은 폭력이다. 다시금 폭력이 사유되어야만 할 때 그것은 바로 자기방어로서의 폭력이다.
본래 남성이 전유하던 폭력은 객관적 폭력이다. 체계가 발명한 생태계에서 남성-동물은 은폐된 포식자-역할 수행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정상성이 자신이 수행하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하지만 폭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합법적으로 승인된 폭력이란 모호하기 그지없다.
“정당방위라는 사법적 합법성을 취득한 폭력의 정당화 양식은 주로 사회적 다수자들의 특권구조의 일부인 것이다. 이에 반해 사회적 소수자―사회에서 가장 목 없는 이들이자 기득권의 수혜구조에서 열외된 이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순간에도 정당방위의 합법성을 취득하기 매우 어렵다.”(윤지형, 「페미니즘 윤리학의 새로운 지평 - 전투적 자기윤리와 자기방어 엘자 도를랑(Elsa Dorlin)의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폭력의 철학 )
합리적 차원에서 폭력을 해결하라는 체계의 요구는 ‘먹잇감의 현상학’을 토대로 한다. 반면, 페르세우스의 목을 자르고 전시해야 메두사의 자기방어폭력은 합리주의의 절차를 거부한다. 포식자의 위치에서 여성의 몸을 착취하였던 남성-동물을 격투(몸싸움)를 통해 제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은 발명된 생태계의 교란종이며, 원초적인 폭력으로 빼앗긴 위계를 다시금 탈취하려는 시도하는 투사다!
일방적인 폭력 서사에 당하는 자로 남지 않아야 한다. 팽팽하게 긴장된 살과 근육으로 다시 상상하고 진입해야 한다. 자기 윤리로서 몸을 발명해내기 위한 일은 폭력을 상상하는 것이다.
빼앗긴 폭력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