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크로노토프)에서 울리는 다성성(多聲性)
황정은 작품의 크로노토프(시공성時公性)에는 어떤 막막함이 있다. 이 공간은 약속된 것 없는 지연된 시간만이 메아리치는 공간이다. 잊혀지지 않는 삶의 가장 깊숙하고도 광막한 어둠, 순수한 자리, 곧 세계의 영도(point zero). 황정은의 크로노토프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대명사 ‘이곳’이다. 물러난 시간과 늦춰진 자리 곁에 문학은 놓인다. 고유한 자리(곳)는 항상 곁을 가리키는 [이곳, 그곳, 저곳]으로서 자신을 말하게 된다. 그중 황정은의 시공간은 ‘이곳’의 성격을 띤다. 다른 자리(그곳, 저곳)와 구별하고 ‘이곳’을 황정은 특유의 윤리 공간을 표현하는 대명사라고 할 것이다. '이곳'은 우리를 되돌려,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어떤 공간이다. 독자는 작품 속에 내던져진 인간이기에 우리는 이미 ‘이곳’에 발을 디뎠다.
크로노토프(Chronotope)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와 공간을 뜻하는 토포스(topos)의 합성어이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의 개념으로 분리될 수 없는 양자의 내적 관계를 통합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글에서 크로노토프는 황정은 작품에서 부각되고 있는 공간성의 특징을 들어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적 개념이다. 황정은에게 공간은 지연, 반복, 도래라는 시간적 개념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작가의 글쓰기가 전개되는 그 공간성이 바로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대명사
대명사흥미로운 것은 명사를 지칭하기 위해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즉 ‘더불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모든 장소는 순수한 장소를 가질 수 없으며 언제나 곁 한 무엇과 더불어 나타난다. 대명사 ‘이곳’은 황정은의 크로노토프가 지니는 긴박한 성격, 지금-여기의 내밀한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본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7쪽)
광막한 어둠은 무한을 연상시킨다. 황정은 소설은 이러한 공간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그의 작품 곳곳에는 규정될 수 없는(indefinite) 공간들이 불쑥 출현한다. 가령 끝없이 낙하하는 공간의 모티프는 소설의 주제적 소재로도 사용되지만, 격자 소설처럼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낙하하는 공간
하지만 무한에는 방향성이랄 것이 없기에 떨어지는 공간은 확증된 곳이 아니다. “어쩌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상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상승하는 것인데 몸이 몇차례 뒤집혀 아래위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상승하고 있다.” 황정은, 「낙하하다」, 『파씨의 입문』, 창비, 2014, 73쪽
상당히 어둡고 긴 굴속을 떨어지면서 앨리스 소년이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상당히 오래전에 토끼 한 마리를 쫓다가 굴속으로 떨어졌는데…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 않고 있네… 나는 다만, 떨어지고 있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계속… 더는 토끼도 보이지 않는데 줄곧… 하고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고 바닥에 닿겠지, 이제 끝나겠지, 생각하는데도 끝나지 않아서, 이게 안 끝나네, 골똘하게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창비, 2013, 132쪽)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을 변주한 것으로 보이는 「낙하하다」는 황정은 특유의 시공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이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낙하’는 닿기를 전제한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암시하는 공간인 반면 황정은의 ‘낙하’는 다른 공간을 전제하지 않은 ‘내던져짐’ 자체이다. 이러한 ‘내던져짐’은 황정은 특유의 필치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선과도 연결된다. 작가의 글쓰기는 바로 '내던져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광막한 어둠’이 직관적으로 연상하게 하는 ‘좆같은 갤럭시’ 이야기도 있다.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창비, 2013, 63쪽
무한과 글쓰기는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작가는 단편 「명실」의 첫 문장에서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명실」)
「명실」은 황정은 특유의 ‘윤리적 글쓰기’를 구성하는 데에 핵심적인 텍스트이다. 소설의 첫시작인 ‘그리고’는 지연과 연접의 접속사로 ‘망각-글쓰기-도래’를 관계 지으며 윤리적 글쓰기와 소설의 시공간의 연관성을 관계 짓는다.
황정은은 ‘글쓰기’의 문제를 자신의 작품 한 부분(문장)부터 소설의 주제적 시도까지 다양한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명실」에서의 ‘그리고’는 글쓰기 이전의 글쓰기, 작품이 열리기 직전에 이미 열린 작품, 모든 쓰인 글쓰기가 결코 쓰인 적이 없는 글쓰기의 서문임을 밝힌다.
하지만 실리는 이야기를 좀처럼 끝내지 못했지…… 하고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실리는 아주 적은 분량을 아주 천천히 썼고 매일매일 전날에 쓴 것을 처음부터 짚어가며 다시 썼다. 덕분에 실리의 이야기들은 마지막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개는 언제까지고 시작을 반복하거나 매번 시작되는 이야기로 남았다. (「명실」, 98쪽)
실리의 글쓰기 곁에 화자(명실)의 글쓰기가 위치한다. 망각 속에서 명실이 강박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바로 노트를 펼치는 일이며, 자신이 이어쓸 글이 실리에 관한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어쓰기는 시간의 잇따름 뿐만 아니라 공간의 이어짐도 보여준다. 명실은 실리의 이야기를 잇기 위해 그의 만년필, 노트 또한 짊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글씨기는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 어딘가에 있다.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실리의 노트가 이 집안 어딘가에 몇 권쯤 남아 있을 테니까.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91쪽)
명실은 책이 되지 못한 실리의 이야기,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다던 이야기를 완성하고자 했다.
벌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책상과 의자. 그건 꼴……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같다고 그녀가 말하자 실리는 그런가, 라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 실리는 그걸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105쪽)
이러한 작가의 글쓰기 공간이 이행을 전제로 한 ‘닿기’가 아니다. 오히려 글의 완성은 중요하지 않고, 지연되고 잊혀진 글 옆에 복수의 이야기를 덮씌운다. 황정은의 시공성 '이곳'에는 하나의 목소리가로 쓰인 이야기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명실」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을 가진다. 가장 내밀하고 독단적인 일기에조차 화자는 두 개 이상의 목소리를 가진다. 이러한 다성성의 문제는 대표적으로 ‘디디의 우산’연작에서 확인된다. 작중 인물들은 결코 하나의 목소리를 공유하지 않는다.
같은 것의 반복이 반복되는 것의 차이를 낳는다. 인용은 곧 같은 것의 반복이고, 인용가능성은 탈맥락화를 동반한다. 그러므로 같은 기호라고 해도 이미 다른 콘텍스트를 향해 열려 있다. 문자는 그 고유한 인용가능성으로 동일성을 파훼한다. 황정은 소설에서 나타나는 다성성(디디/dd, 도도/d, 비비/박조배, 조/김소영 등)은 이러한 되받아쓰기의 효과 중 하나다. 이 인물들의 동일성을 따ᆞ져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명실」의 첫문장이 접속하고 있는 공백, 즉 이야기는 본원적으로 탈맥락을 내포하기에 명실이 실리의 글을 이을 수 있는 것이다.
황정은은 ‘디디의 우산’ 연작뿐만 아니라 단편 소품들을 탈구시켜 이곳저곳 서로 다른 소품에 이어 붙인다. 이야기를 거칠게 떼어내어 전혀 다른 곳에 과감하면서도 은밀하게 인용하다. 특히 최근에 출간된 『디디의 우산』에는 기존의 단편(「디디의 의산」, 「웃는 남자」, 「d」,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외에도 「뼈 도둑」과 「명실」이 덧대진 것으로 보인다. 덧씌운 이야기, 팔랭프세스트(palimpseste).
팔랭프세스트, 덧씌어진 이야기는 존재를 명시하거나 증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러진 필체들은 두텁다.
이러한 작업은 글쓰기의 자리에 윤리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이곳’의 시급성을 글쓰기의 당면 문제로 만든다. 예를 들어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우리를 단번에 ‘이곳’으로 위치시키는 힘이 있다. 더 이상 관조할 수 없는 자리. 즉 목격자의 자리로 세우는 힘이다. 목격자로서 우리는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아야 했고 하수처리장 냄새가 나는 고모리, 무덤이었던 고모리 앞에 던져진다.
그대는 앨리시어가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 버스 정류장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감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창비, 2013, 7~8쪽)
그대는 고모리를 기억하나. 여기 모퉁이에서, 지린내나는 구정물에 발을 담근 채로 눈을 뜨고 꿈을 꾼다. 그것을 다시 목격한다. 고모리는 멀지 않다. 그대가 사는 곳에서도 멀지 않을 것이다.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창비, 2013, 10쪽)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무섭고 집요하리만큼 반복되는 저 물음 앞에 우리는 한순간도 목격자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 숨결마저 가까이에서. 그러나 이리도 무력한 눈으로.
그대는 어디에 있나. 그대가 폭력의 증언자다. 어떤 대답으로도 종결되지 않는 저 물음으로 독자는 ‘이곳’을 직면한다. ‘이곳’이란 되받아쓰기가 그 자체로 문제인 자리, 황정은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자리, 폭력 앞에 내던져진 인간으로서 증언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것들 어디까지 들었나.
이것을 기록했나. 마침내 여기까지, 기록했나.
앨리시어가 그대를 기다린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161~162쪽)
그녀가 그 문장, 그 이야기들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명실」, 『아무도 아닌』, 98쪽)
증언은 반복으로 당대성을 말한다. 황정은의 되받아쓰기가 증언인 것은 그의 글쓰기가 폭력의 압도적인 공간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쓰기의 공간이 문학의 공간이라면, 그것은 문제화된 글쓰기의 시공성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언제고 벌판에 내버려진 채 마리코가 당도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가 있다. 마치 전운이 감돌듯 「명실」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끝내 실리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내지 못했다. 폐가 약한 실리가 책더미에서 서서히 죽어간다고 명실은 생각했다. 명실에게 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야기들에 이르는 이야기를 쓰지 못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실리는 또 어땠나. 그까짓 것. 그까짓 것들이 실리를 죽였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수십 년이 흐리는 동안 그녀는 어느 것도 펼쳐보지 않았다. 펼쳐보는 이 없으면 ……닥치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었다.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108쪽)
수만 권의 책 중에 명실이 찾는 책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명실은 실리의 책상과 만년필 그리고 노트 앞에 앉는다. 화자로서의 명실이 되받아 쓴 첫 번째 이야기는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실리의 이야기다. 이제 명실은 서서 마리코를 기다리지 않고, “앉아서 마리코를……실리”(「명실」)를 기다린다. 마리코와 실리가 도래하는 공간, 그 기다림이 바로 글쓰기의 공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명실」)
열두개의 원고. 모두 미완이므로 종합 열두번의 시도, 그 흔적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매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단 한가지 이야기.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디디의 우산』, 151쪽)
황정은은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엄지혜: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주인공에게는 ‘단편이 되다 만 열한개의 원고와 장편이 되다 만 한 개의 원고”(151쪽)가 있어요. “어느 것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매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 주인공은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하길 원했어요. 이 장면을 읽은 독자들은 자연스레 소설가 황정은을 떠올릴 것 같아요.
황정은: 네.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 문장들을 썼어요. 소설 쓰는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어요. 이야기 밖에서도 그 노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채널예스, <[커버스토리] 황정은,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소설>, 2019년)
「명실」에서 중요했던 것이 다시 쓰기 순간이라면, 그것의 글쓰기는 어떤 식으로 끝맺을 수 있을까?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는 것일까. 그 이야기가 거기서 끝난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알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디디의 우산』)
이 물음은 다시 황정은의 글쓰기 공간으로, 어떤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이곳’으로 부른다. 여기서 ‘이곳’은 서로 추상적으로만 구분 가능한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끊임없이 증언자로서 불림 받는 자리, 광막한 글쓰기를 이어가야만 하는 자리,
그녀는 실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그 이야기의 화자라면……나는……새벽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 벌판에.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109쪽)
그리고 압도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대명사, 즉 가능한 모든 윤리적 시도의 곁-자리. 그런데 이러한 황정은의 크로노토프에서 어떤 변화가 감지된다. 변화의 인상은 『디디의 우산』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데, 글쓰기의 근본 기조였던 ‘내던져짐’이 아닌 ‘닿기’로, 즉 세계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준 우화에 따르면 다른 데로 가기 위해서는 바닥에 닿아야 한다.
너 토끼굴이 얼마나 길고 깊은지 아냐? 그건 진정 긴 굴이었다. 앨리스 소년은 떨어지면서 다시 기다렸다.
뭐를?
바닥에 닿기를.
뭘 하려고?
그래야 다른 데 가지.
어어. (『야만적인 앨리스씨』, 131쪽)
『디디의 우산』 출간 이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부분이 있다. 황정은 작품의 공간성에서 어떤 변화를 느낀 독자의 물음이다.
엄지혜: 서수경과 김소리, 정진원 등 등장인물의 이름을 성까지 호명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더 분명하게 호명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황정은: 더 분명하게 호명하고 싶었습니다. 최근 소설 작업에선 가급적 구체적인 지명과 주소를 언급하고 있어요. 그렇게 쓰는 게 지금은 좋아요. 그래서 인물의 이름도 가급적, 이웃에 한 명은 있을 법한 이름을 씁니다.
(채널예스, 「[커버스토리] 황정은,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소설」, 2019년)
황정은의 소설은 대개 추상적 인물과 방위 없는 장소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무도 아닌』에서 내비친 전조와 올해 출간된 『디디의 우산』을 보면 익명의 공간이 유명의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소성은 ‘귀환’이라는 주제로 부각된다.
일상에서 내 기도의 내용은 서수경의 귀가이다. 서수경이 매일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저 바깥에서, 매일 죽음에서 돌아온다.
나한테 뼈 한조각을 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258쪽)
‘기다림’과 ‘도래’가 황정은 소설에서 중요한 시공성을 이루는 가운데 작가는 ‘이곳’에 구체적 실존을 덧붙이며 ‘귀환’을 강렬히 소망한다.
그 기다림엔 늘 죽음이 준비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예감되어 있다. 서수경과 나를 건드린 것은 아마도 이 기다림일 것이다. 당신의 귀환을 기다린다.(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255쪽)
또한 구체적 언명은 혁명을 공간화하는 방식에 심심찮게 보인다. 스스로 던진 질문(“폭력이라는 방에 갇힌 한 인간이 과연 그 방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응답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에게 이러한 이행은 의미심장하다. 혁명은 진공을 가로지르고 글쓰기는 ‘내던져짐’에서 세계로 도약한다.
세종대로 사이 거리는 두 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이 되어 있었다.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어 진공이나 다름없었다. 사십여분 전에 박조배와 d가 머물고 있던 청계광장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중략) 저 소리는 이 간격을, 이 진공을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배야 이것이 혁명이로구나. (중략) 여기 도착했구나. 혁명은 이미 도래했고 이것이 그것 아니냐고 나는 생각했다.(「d」, 『디디의 우산』, 132-133쪽)
하지만 황정은이 도약하고자 하는 세계는 ‘다른 세계’가 아니다. 『디디의 우산』에는 올바름에 대한 긴장이 서려 있다. 혁명의 순간 ‘정치적 올바름’을 외칠 때조차 이미 그 올바름은 ‘역사화된 올바름’이다. 폭력의 바깥에 위치한 역사란 없다. 혁명의 공간이 곧 세계이고 그 세계가 ‘다른 세계’가 아닌 이상 광장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린다. 명실이 실리와 마리코를 기다리던 자리, 앨리시어가 부른 그대의 자리, 작가가 멈출 수 없었던 글쓰기의 자리가 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폭력의 압도적인 공간에 다시 놓이게 되는 것일까. 폭력의 시학을 맺을 수 있을까. 유토피아가 아닌 ‘이곳’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글쓰기는 이어진다. 낙원에는 수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황정은: 저는 그날 광장에 있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화자처럼 거실에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같이요. 재판 결과를 같이 듣고 싶은데 광장엔 나갈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 그 집에 모여 있었어요. 소설 속 구성원과 비슷했습니다. 비혼 여성, 아이를 키우는 여성, 미취학아동, 성소수자…… 사회적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이요. 선고는 21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무척 길게 느껴졌어요. 재판 결과엔 기뻤지만 저는 그 21분 중에 우리가 가장 낙담하고 절망하고 불가능성과 실패를 강하게 예감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 거실에 모인 사람들이 직전을 목격하고 있는 때. 혁명이든 가능성이든 승리든, 그것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때. 그 순간에서 멈추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채널예스, <[커버스토리] 황정은,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소설>, 2019년)
이 비평 공간도 하나의 팔랭프세스트이다. “압도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인간에게”는 「명실」에서 떼 온 것으로 글의 모양새가 우로보로스(Ouroboros)를 닮길 바랐다. 명실이 실리의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글쓰기는 공모적 관계인 한에서 비평은 작품 곁에 있다.
“그리고……그리고”이곳(크로노토프)에서 다성성(多聲性)은 울리고 있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은 그 불빛들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다만 어둠일 뿐인 공간을 수평선으로 나는 것. 그녀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명실」, 『아무도 아닌』,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