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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May 04. 2022

[서평] 황혼이 지나고

제5회 혼물문학상 감상문 공모전 출품작 <플라멩코 추는 남자> 서평


삶에 덧붙여진 여러 은유 중 ‘황혼(黃昏)’이란 말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다. 이 표현은 생의 주기가 마치 표준화된 절기처럼 싱그러운 여름을 지나, 밤이 길어지는 ‘추분(秋分)’에 접어든 것을 연상케 한다. 생장을 독려하던 여름의 태양이 어느덧 자신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꽃과 열매는 땅거미 진 어스름한 빛을 닮아 시들어 간다. 예순갑자 돌아 나온 노년에 이르러 지난 삶의 섬광을 되짚어 은퇴를 준비하는 일은 책의 서문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겹겹이 쌓인 복잡한 관계를 하나씩 다시 정리해 “자신이 똑바로 설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며 “바로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105쪽)된다. 하지만 서문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일쑤인 책만큼이나 우리 삶도 밀려간 시간을 정리해 봐도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서술보다 항상 앞서는 생(生)이기에 인생이란 처음부터 직서주의로 풀어낼 수 없다. 숱한 과정 속 도달과 실패는 미완으로 남아 불안을 지핀다. 그렇게 인간은 운명 어디에도 없는 삶의 완결을 분주히도 꿈꾸고 불멸이란 도달 할 수 없는 완전(完全)을 영혼으로 기도한다.     


굴착기 운전사라는 직업군에서 한 발짝 물러섰지만 인생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미완성이었고, 미완성된 인생은 흉물스러운 것이라고 남훈 씨는 생각했다.(177쪽)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허태연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예순일곱에 은퇴를 준비하는 남훈 씨의 이야기다. 남훈 씨는 이십육 년 간 굴착기를 운행하며 ‘모든 건축에 기여’ 한다는 신념 아래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왔다. 남훈 씨는 자신의 천직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굴착기는 불도저처럼 단순히 파헤치거나 밀어버리는 해체 작업과 다르다. 건물이 바로 설 토지를 다지고, 도시가스와 수도배관이 들어 올 길을 열어 연결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집(家)의 토대 세움이 남훈 씨의 일인 것이다.     


보드라운 땅에서 쓰레기나 암석을 골라내고, 수도관 따위를 교체하느라 파헤친 땅을 되메우는,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버킷으로 땅을 덮고 다지면, 그 위에 도로가 깔리고 집이 생기고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섰다. 남훈 씨는 그 모든 건축의 기초에 기여하는 게 좋았다. 그 일을 통해 가족을 먹이고 집을 샀다. 스페인으로 여행도 갔다. 소중한 천직이었다.(259쪽)     


이렇게 터전을 닦아내는 일은 가장(家長)과 닮은 구석이 있다. 빗속에서 처마가 아늑한 쉼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남훈 씨는 가족의 지붕이길 자임했다. 부족함 없이 키우려 노력한 딸 선아가 중학교 교사로 임용되었을 때 아버지로서 또 하나의 역할을 완수했다고 여겼다. 그즈음 자신의 삶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애를 쓴 남훈 씨는 삶의 종반부에 쓰일 진실한 의미를 새기기 위해 은퇴를 결심한다. 

남훈 씨를 비롯해 성격(Character)을 지닌 인간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진다. 이 역사는 생각보다 연속적이지 않아 주요한 생애사적인 사건을 기점으로 단절면을 형성한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바위의 지층이 시대에 따라 층리로 경계 지어져 있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 또한 숱한 불연속이 퇴적되어 온 결과이다. 남훈 씨의 경우 죽음이 그러하다. “1995년 12월 14일. 어제, 나는 죽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태어났다.(20쪽) 알코올중독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배회했던 남훈 씨는 “남은 생애 꼭 이루고픈 목표들을” ‘청년일지’라는 소가죽 표지의 그럴싸한 노트에 기록하며 이룰 것을 다짐했다. 사실 남훈 씨가 결심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공포가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이란 ‘사건’이 남훈 씨의 역사에 층리를 생길 만큼 생애사적이었던 것은 삶에 대한 책임, 즉 자기 삶에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소설에서 ‘책임’에 대한 남훈 씨의 고뇌가 자주 엿보이는데, 이것은 삶을 기록할 역사가이자, 작품으로 조각해낼 예술가로서 본인에 대한 임무를 다하지 못했기에 나타나는 불안과 섞여 있다. 토대를 굳건히 지키는 일에 신념을 다 받쳤지만, 정작 본인의 안식이 기거할 삶의 건축술에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차를 몰고 또 관리해보니까, 영감님이 까다롭게 구신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주차장 입구에서 창문을 내리고 청년이 말했다.
“그래. 왜 그런 것 같아?”
아주 잠깐 청년은 말이 없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럽지 않으려고요.” 청년이 말했다.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 그러신 것 같아요. 뭐에든, 누구한테든.”
갑자기 몸이 굳어 남훈 씨는 돌처럼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으려는 걸 남훈 씨는 꾹 참았다.(86쪽)     


“마흔한 살 되던 해 겨울” 남훈 씨에게 닥친 결심은 마흔셋에 아내를 만나 다음 해 얻은 딸 선아에게 전념하느라 “노트의 절반 정도가 부끄러운 여백”(38쪽)으로 남아 있게 된다. 머쓱하게 빈 여백을 바라보지만 “거기에 젊은 시절의 각오가 담겨 있다는 것을”(19쪽) 잊은 적 없었다. 청년과 노년 사이에 이십여 년의 시간이 떨어져 있지만 그것의 바탕 기조는 같다. 청년일지에 기록된 일곱 개의 목표는 ‘부끄러움’이란 근본기분이 바탕 되어 있다. 중요한 전개이자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하며 지켜보게 한 일곱 번째 과제 “보연을 만나 사과하기”(198쪽)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남훈 씨는 첫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딸 보연을 버렸다는 것에 강한 부채감을 느낀다. 한 번도 청년일지의 과제를 잊은 적 없었던 그에게 일곱 번째 과제는 주어진 시간 안에 반드시 이뤄야 할 숙원이지만, 부끄러움에 직면하기 어려운 심리적 장벽과 가족의 터전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적 장벽 사이에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던 중 이십여 년 사이에 느슨하게 늘어진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일이 생긴다. 또 다른 ‘죽음’이 남훈 씨에게 엄습해왔다.        


재작년 겨울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불안은 더욱 커졌다. 26년 전, 그가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도 꼭 그런 겨울이었다. TV 뉴스에 코로나19로 죽은 사람들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남훈 씨는 망자의 나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23쪽)     


코로나19 팬데믹이 드리운 어스름한 죽음의 그림자가 느슨했던 남훈 씨의 시간을 급격하게 당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의 시대적 배경은 ‘코로나19 팬데믹’이며 현재 우리는 동시대에 놓여 있다. 동시대인으로서 현재를 ‘시대적’이라 표현하는 것이 낯 뜨거운 일일 수도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회와 산업 그리고 사람이 관계하는 윤리 모델까지 유례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례로 사회적·실존적 소외의 문제는 팬데믹 시대에 맞게 이해되고 있는데, 소외가 하나의 사회 문제로 이해되고 질문받아온 시대를 지나, 기술이 매개되어 소외가 안정과 효율을 위한 일반적 사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론장이 축소와 어느 때보다도 활개 치는 혐오정치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태연의 소설이 툭 건드리고 있는 것은 작금의 상황 아래서 가족으로 대표되는 연대와 관계의 이야기다. 여기서 연대는 강한 결속으로 묶인 관계를 지칭하기보다 유연하고 보다 광범위한 범인류애적 관계 윤리를 말한다.     


“플라멩코를 출 때 말이죠, 가장 중요한 건 사랑입니다. 그건 이성 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게 아녜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거죠. 그것이 타지를 떠돌며 살고 사랑한 집시의 정신입니다.”(254-255쪽)  

   

이는 남훈 씨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딸인 보연과의 재회는 불안과 후회의 연속, 아름다운 재회와 사뭇 달랐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청년일지에 남겨진 과제를 수행하는 이야기가 주요 서사인데, 이 모든 것이 사실상 미숙한 미완의 과정이다. 서평 서두에 의미를 매듭짓고 싶은 인간의 숙명적 욕망과 삶의 종장에 진짜 의미를 새기고 싶은 남훈 씨를 언급했었다. 어쩌면 이와 상반되는 전개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지점이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 독자에게 내놓는 지평이라 생각한다.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56쪽)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고 배운다는 카를로스(스페인어 강사)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단 언어뿐만 아니라 세계의 확장과 관계의 형성은 늘 어리숙한 과정의 성격을 지닌다. 스페인어, 플라멩코, 요리 그리고 ‘아버지다움’ 남훈 씨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병을 앓을 정도의 어려운 일이었다. 이 미완곡들은 어설프게나마 시연될 수 있었는데, 결코 혼자서 공연할 수 없었을 것들이다. 꼬장꼬장했던 예순일곱의 한 노인이 황혼의 낙조(落照)로 삶을 완성 짓는 것이 아닌 삶의 종장에도 세계가 넓혀지고 확장하고, 심지어 거대한 바위 지층에 또 하나의 역사를 새겨 넣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로소 남훈 씨는 집(家)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데, 토대를 닦는 일과 처마로 터를 보존하는 일은 함께하는 세계를 공동 형성하는 일이다. 


보연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후 남훈 씨는 사진 앨범과 편지를 받게 된다. 그 상자 속에는 익숙한 “황량한 사진”과 낯선 “작은 발”이 보였다. 보연은 남훈 씨의 휴대폰에서 찾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고, 그 속에서 자신이 알지 못한 ‘아빠’의 흔적을 이해하게 된다. 보연은 그의 황량한 사진을 하나씩 인화하여 하나의 앨범에 담았고, 다른 앨범에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넣었다. 보연의 사진은 남훈 씨가 다져놓은 황량한 땅은 사실 불특정한 타자의 삶의 토대로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흔적의 목격자로서 보연은 남훈 씨의 삶에 의미 하나 더 새길 증언자가 된다.     

 

난 아빠가 그 사진들을 찍어놓고 다시 보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어. 아빤 그냥 필요에 의해 그것들을 찍었고, 언젠가 그것들을 써먹을 생각이었겠지. 뭐, 작업한 돈을 떼이거나 했을 때 말야. 
내 눈에는 그 사진들이 의미가 있어 보였어. 그래서 아빠가 다시 그 사진들을 보면 좋을 것 같더라. 마치……아빠가 나를 다시 찾았듯이.(263쪽)     
그는 더 이상 사진을 볼 수 없었다. 때로는 눈길 위에, 때로는 빗물 웅덩이 속에, 때로는 쨍한 태양 아래, 보연의 작은 발이 귀퉁이마다 찍혀 있었다. 어쩌면 그 애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주말마다 혹은 휴일마다 제 아비의 흔적을 찾아 그 애가 헤맸을 것을 생각하니 남훈 씨는 속이 상했다.(264-265쪽)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예순일곱의 노인이 여덟 번째 과제를 쓰는 것으로 글을 닫는다. 과제가 적힌 그럴싸한 노트가 ‘청년일지’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같다. 소설은 항상 새로운 하늘을 열 필요가 없는데, 그 편안하고 익숙한 주제가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근본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남훈 씨가 새기려는 완전(完全)이란 소멸 속에 수놓은 불멸의 기록, 그러니까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은 역사서이자 작품으로, 누구든 그 여정을 따라 걷게 된다는 것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있다. 


과제8. 한 달에 한 번 꼭 보연을 볼 것(268쪽)     

남훈 씨는 그렇게 썼다. 그리고 ‘청년일지’를 탁 덮었다.(같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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