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기의 공원과 토포포비아
오래전 누군가의 손바닥에 귓불을 맡기길 참 좋아했지만, 귓바퀴가 맡겨지기 훨씬 전부터 손바닥은 손가락의 차지였습니다. 손은 움켜쥐는 것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삼고 있지 않을 테지만, 무엇 때문인지 주먹 쥠은 습관처럼 쉽습니다. 그런데 바득 잡은 손에서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납니다. 어쩌면 “까드득”일지도 모릅니다. 겨울 소리가 납니다. 나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입니다. 겨울 소리는 비벼지는 소리와 닮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요. 분명 더 오랜 역사가 있겠지만, 내 기억은 겨우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포항의 어느 바다에서 빈 소라를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배운 대로 행동했습니다. 바다를 품은 소라에서, 잃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여러분은 찾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찾지 못했어요. 바다의 깊고 두터운 소리보다는 훨씬 건조하고 얇은, 부서지는 소리 같았어요. 오히려 바람 바스러지는 소리 같은 것이요. 건조하고 차가워서 가볍게 하늘로 오르는 소리요. 그해 바다는 분명 여름이었는 듯하지만, 나는 그 이미지를 회상할 때면 조금 추워집니다. (강병우,「겨울시」, 2018)
시절이 사진 한 장으로 남는다는 말은 인화된 종이에 인물이 배경과 바짝 붙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런 위화감 없이 시절을 그려볼 때 불러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그날에 입었던 옷, 머물렀던 집, 어떤 이의 피부, 고장 난 뻐꾸기시계 소리가 주체의 배경이길 그친다. 더는 그것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만약 사진의 귀퉁이가 찢어졌다면 그만큼 회상을 꿰어낼 단추 하나가 부족해진다. 이럴 때 전력을 다해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사물과 배경과 인간의 분리 불가결한 애착을 다시 부르는 일이 된다. 이렇게 인간과 배경 간의 정서적 유대와 감응을 토포필리아(Topopillia)라고 한다. 장소애라고 번역할 수 있는 토포필리아는 일상에 가까운 말로, 고향의 정취 가득한 향수(鄕愁)와 유사하다. 인간은 어쩌면 시간보다 장소에 더욱 밀접한 정체성 연관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소애
공간(raum/space)과 장소(topos/place)는 유사하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추상적인 의미가 강한 공간에 비해 장소는 인간 경험이 작용하는 고유한 가치가 부여된 자리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존하는 자리는 근본적으로 장소화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장소’는 인간 주체의 지향성을 통해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을 지향의 중심에 놓게 하는 가치중심적 공간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인간 몸을 ‘헤테로토피아’로 설정한 미셸 푸코의 작업이 인간주체의 탈중심화로써 몸을 재정의하는 것이 흥미롭다.
토포필리아는 사진처럼 인간과 사물을 한 장으로 담아낸다. 사진의 입장에서 인간과 사물은 구분되지 않는 객체여서, 하나의 객체가 일방적인 관계를 점유하지 않는다. 사물은 인간처럼, 인간은 마치 사물처럼 엮어 하나의 감응구조에 결속시킨다. 이것이 토포필리아가 지닌 커머닝(commoning) 효과이다. 장소와 인간 그리고 비인간 커머너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서적 유대를 쌓아간다. 이러한 토포필리아는 강렬한 경험이라기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섬세하게 형성되는 퇴적의 과정이다. 그렇게 커머너들은 서로에게 관여하며 공동 구성한다. 커먼즈(commons)를 공유된 자원과 공동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통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한 실천이라 이해한다면, ‘커머닝’은 새로운 커먼즈를 만들려는 일련의 과정과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감응구조의 단절은 유대를 엮어내는 장소 정체성의 상실, 즉 무장소성의 표식인 토포포비아(topophobia)가 된다. 문자 그대로 인간이 특정 장소와 맺는 관계에 대한 강한 불안과 억압, 그에 따른 혐오적 정서를 갖는 것을 토포포비아라고 한다. 토포포비아는 뒤이어 일제감정기의 신사공원과 개성에서 발견되는 뿌리-장소의 상실, 무장소성의 대표적인 감응구조이다. 커머너들의 상호 고립은 장소의 부재를 야기하고 곧 커먼즈 해체를 가속화 한다. 커먼즈의 역사는 이러한 감응구조(필리아/포비아)의 결속 형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 사회 역시 커먼즈의 형성이 토포필리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에서 장소와 공동체의 상호 결속은 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토지 신(社)을 모시는 공동체가 곧 마을이 되었고, 마을 단위의 부족연맹체가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나라를 조정하는 사직(社稷)은 토지신(社)과 곡물신(稷)을 모시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땅을 중심으로 한 결속된 감응구조는 공동체로 발원하고 우리 역사의 근본적인 장소공동체를 형성시킨다. 공동체 양식의 변형은 토포스와 맺는 관계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따라서 토포포비아의 무장소성은 위에서 서술한 공동체 결속과 반대로 공유된 장소정체성의 약화로 이어진다. 우리의 경우 일제식민의 토포포비아가 대표적인 경우가 된다. 커먼즈와 장소의 관련을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공유된 토포포비아를 배경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도시)공원과 개성은 식민주의에 의해 이식된 공통 표상을 보여준다.
토지신
고대 중국에서, 토지의 수호신 및 그 제사 또는 그 수호신을 중심으로 한 스물다섯 가구의 부락을 이르던 말. (출처: 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마을
동아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토지를 신[社]으로 모시고 살았다. 토지를 모시는 공동체 단위가 곧 마을[社]이었다. 가구[家]가 다섯이 모여이웃[隣]이 되고, 이웃 다섯이 모여 마을[社]을 형성했다고 한다. (정기황,「공유지(共有地) 개념 변화로 본 토지제도」, 『문화과학』 통권 제101호, 문화과학사, 2020, 99쪽)
‘
공원’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에 조계가 설치되었을 때 조성된 'Public Garden'을 번역한 신조어다. 한국의 경우 1880년대 중반부터 공원이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해외 파견 사절단의 보고서나 개인의 일기 및 견문록에서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1880년 이전에 눈에 띄는 유학생 일기장, 견문록 등 당시 문건에서 공원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76년 개국 이후 공원에 대한 정보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사절단과 유학생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도시공원에 대한 표상은 근대화의 중요한 상징이 된다.
“공원은 아름다우며, 여행자에게 구미의 과학과 기술이 여하히 불모의 섬을 즐거운 자신의 집과 같은 휴식의 장소로 바꾸어 만들어 버리는가를 생각하게끔 해 준다. 참된 의미에서 유럽인은 자연을 컨트롤할 줄 알고 있다.”(1896년 12월 24일)고 일기에 기록하며 공원이 계몽의 시설인 동시에 복지시설이라고도 생각했다. (강신용 외,『도시공원사』, 대왕사, 2004, 27쪽)
서구에서 유입된 도시공원에 대한 생각은 조선 최초의 공원 조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하면서 근대 계몽과 도시위생 개념, 조선의 자주독립 수단으로 독립공원 계획이 수립된다. 독립신문 창설 이틀 후 한 논설에서 독립공원의 취지를 밝혔고, 그 역할에 대해 기대되는 바가 컸다. 처음에 공원(Public Garden)은 새로운 장소정체성의 (도시)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하나의 토포스로 수입된다. 하지만 공원에 대한 이해는 식민지화되면서 그 역할과 이해 또한 변형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식민과 근대화라는 이중구속(double bind)이 공원을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식민-근대화는 장소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독립신문과 공원의 역할
“조선이 독립한 것을 세계에 알리고, 자자손손 이때에 조선이 영원히 독립했다는 것을 전할 표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조선의 인민이 양생하기 위해서는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경치 좋고 한정한 장소에서 운동도 해야 한다.” (강신용 외, 앞의 책, 34쪽)
한국 근대사에서 공원은 일본의 식민정책(내선일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일제는 동조동근을 강조하며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장소)정체성을 심기 위해 도시공원의 성격을 ‘신사공원’으로 바꾼다. 신사공원은 신사와 신궁 경내에 조성된 경내 녹지로서 근현대사 초기에 조성된 공원의 경우 두 곳(독립공원, 파고다공원)을 제외한 나머지 공원은 모두 신사 내부 녹지에 조성된 신사공원이다. 신사 부지 확장에 따라 주변의 신역화가 동반되는 공간이 되었기에 당시 조선인들에게 공원은 장소정체성의 탈각과 강요가 중첩되는 회피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남산 인근의 조선신궁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도구이기에 기피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통감부가 남산 북면의 거류지 주변 일대에 벌채, 토석, 채취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림으로써 물리적 유대마저 끊었다. ‘남산’과 분리된 유대는 토포필리아의 약화와 상실을 드러내는 좋은 예다. 남산을 신역화하는 일은 결국 왕실 소유토지를 개방으로 이어진다. 왕실 소유토지 개방은 식민 초기부터 이뤄졌는데, 특히 수도에 계획된 대부분의 공원 조성은 왕실 소유의 토지를 개방함으로써 확보된 부지이다. 왕실 소유토지의 공원화는 토지를 일반 백성에게 개방하여 조선의 정통성을 약화하려는 식민 통치의 목적과 전(前)근대적 체제에서 근대화로의 이행이란 근대성 담론과 엮여 있다. 한국의 최초의 동물원이라고 알려진 창경궁의 동물원화 역시 왕실 소유토지의 개방과 토포필리아의 다른 사례이기도 하다.
조선신궁
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운, 신궁(神宮)이라는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神社). 일제는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거나 조차권·위임통치권 등을 얻으면 그 지역에 예외 없이 관립 신사를 세우고 이를 총진수(總鎭守)라 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꾀하였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하게 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하여 각 지역에 관립신사를 세우고 기존의 일본 거류민들이 건립한 민간신사도 관공립화하여 지원하였다. (‘조선신궁[朝鮮神宮]’, [네이버 지식백과])
남산과 토포폴리아
서울 남산의 역사와 경관은 서울 사람들의 삶과 자취를 반영한 거울이다. 조선시대의 영광부터 일제강점기의 굴욕까지 고스란히 겪었던 남산의 존재는 서울 주민들의 생활사를 응축한 단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래 남산은 수도의 공간적 중심지에 있었기에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남산은 한성부의 도시 공간 구조를 결정하는 데 큰 작용을 했다. 풍수 국면으로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인 남산은 북악산과 상대해 도성 공간의 축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남산의 지형을 따라 건설된 도성은 성 안과 밖을 가르는 주거 공간의 계층적이고 차별적인 분포를 나타나게 했다. (「늘상 마주하던 ‘한양의 랜드마크’」, 한겨레21, 2009. 9. 24 수정, 2022. 04. 28 접속,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5806.html)
창경궁과 동물원
창건 이래 끊임없는 소실과 복원을 거듭하면서도 궁궐로서의 격과 위상을 지켜왔던 창경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이다. 순종은 즉위하자 거처를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 일을 계기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그해부터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융희 3년(1909)에 개원하였다. (‘창경궁’,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공원과 구분될 수 있었던 독립공원이 채 빛도 보기 전에 황폐화되었고, 파고다공원의 경우 1910년 이전까지 벤치, 화단, 전등이 설치되지 않아 공원으로서 기능이 늦게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7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시체제가 격화되며 공원은 신사공원의 기능뿐만 아니라 방공호로써의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공원의 단어적 의미가 무색하게 공원과 시민은 사실상 정서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장소와 맺은 결속이 사실상 해체의 과정을 겪으며, 공간과 분리될 수 없는 객체들의 장소정체성은 약화되기에 이른다. 종합해보았을 때 당시 조선은 공원에 대한 지배적 감응구조로 토포포비아를 공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또 다른 토포포비아로서 경성은 식민화된 조선의 무장소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중 경성역은 외관이 서구 근대화의 상징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고, 그 필요가 군사적 목적 아래 세워졌다. 경성역은 끊어진 경인선과 경부선을 서울 한복판으로 끌어오면서 인천과 부산을 서울과 연결하여 조선과 대륙을 연결하는 식민 침략을 위한 물자수송의 역할을 수행한다.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 공간의 재편성은 철저히 식민자들의 이해에 맞게 작도되었다. 조선총독부, 경성우편국, 조선저축은행 모두 과시적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러한 경관은 조선인에겐 낯선 것이었다. 그들이 우편과 전보를 붙일 때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안에서 서투른 일본 말로 써야 했다. 이에 더해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는 옛 궁궐의 상실된 장소정체성과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성찬하는 토포포비아의 극단을 보여준다. 제국의 시선으로 재편성된 경성은 식민-근대화와 토포포비아의 관계, 그리고 장소정체성의 상관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식민주의와 조선 근대건축 양식
192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와 조선신궁이 완공되면서 현재의 태평로, 남대문로 주변에 일제의 관공서, 금융시설, 호텔 등이 차례로 자리 잡았다. 경성(서울)역, 경성부청(서울시청), 조선은행, 조선호텔 등이 대표적인 건물들이다. 대부분 외국에서 유학한 일본 건축가들이 설계했다. 조선은행 건물의 경우 동경대학 조가학과(건축학과의 전신)의 1회 졸업생이며, 영국 유학을 마치고 당시 일본에서 설계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던 다츠노 킨코(辰野金吾)가 설계했다. 일제는 그들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는 르네상스, 고전주의(古典主義), 절충주의(折衷主義) 등의 양식주의(樣式主義) 건축으로 공공건물들을 지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는 1925년 완공된 경성역, 1915년 건설된 경성우편국, 1910년대에 들어선 조선은행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신궁 조성 서울 미관 파괴’,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날 토포포비아의 무장소성은 어느덧 익숙한 감응구조가 되었고, 토포필리아는 희소하고 낯선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커먼즈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토포포비아와 장소정체성의 해체에 대한 비판적 성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토포필리아가 단순히 가치우위에 있어 목표해야 하는 감응구조인 것은 아니다.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토포포비아의 커머닝 작동 양식이다. “공유된 자원과 공동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통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한 실천”으로 커먼즈를 정의할 때 이 공통 운영과 관리에 참여하는 커머너에 관한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토포포비아는 커먼즈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를 소수에게 배타적으로 분배한다. 예컨대 토지를 소유의 관점에서 소수의 커머너만이 협상력을 행사한다면 토지는 토포포비아의 감응구조를 공유하게 된다. 반대로 커머너에 대한 기존 입장을 확장할 수 있다면, 토지 역시 더 이상 점유의 문제만이 아니게 된다.
커머너의 행위력 재분배
“우리가 땅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땅이 우리를 점유한다면? “이 영토에 속한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바뀌었다. 소유자를 소유하는 행위성을 지칭한다! 대지가 이젠 인간 행위를 틀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행위의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간이 위도와 경도의 격자를 가지고 일하는 지도 제작자의 것이던 때는 지났다. 공간은 동요하는 역사가 되었다. 인간은 그 역사의 참여자 중 하나로 변화에 반응할 뿐이다.” (브뤼노 라투르,『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67-68쪽)
토지를 점유의 관점이 아닌 다른 대안적 시선 아래에 놓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이 시도는 토지를 소유에 근거한 소유공간(私有化)과 사용에 대한 사적공간(私的化)을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화 개념은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신고제 조사로 진행하여 수많은 공유지를 사유화하여 사유재산 개념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사유화는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는 소수(일본 사람 또는 일부 특권층)에게 장소가 귀속되어,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농민 커머너는 장소와 분리된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많은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대대손손 전해온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박탈당한다. 한순간 장소와 공유하던 유대가 끊어진다. 반면 ‘사적(私的)’화는 경합성은 있되 참여의 배제성은 없는 재화의 사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공유지에서 어떤 사적인 수혜를 취득했을 때 나타나는 반감은 공유지의 사회안정망 기능을 도외시하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오히려 커먼즈가 지닌 공공성은 배제된 커머너가 확보하기 힘든 최소한의 사적공간을 지켜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박탈 “첫째 국가만능주의이오, 둘째 행정처의 과신이라 민간 공유로 확인함이 국유 편입에 비하여 불안정·불확정하다 하는 것은 요컨대 인민의 지식과 도덕을 무시하는 동시에 차(此)를 오즉 국가에 취하야서만 발견하랴 하는 것이니 이 엇지 인민을 무시함이 아니며 국가를 만능시함이 아니리오. 설혹 국가를 만능이라 할지라도 국가 사무 처리의 임(任)에 당하는 행정관의 선의와 완전성을 절대로 신임하지 아니 할 것 갓흐면 그 소위 불안전·불확정의 반대인 ‘안전’ ‘확정’을 도저히 기대치 못할지라.”
(「울산군청에 질문하노라(공유지소 문제)」, 동아일보, 1992, 재인용: 정기황, 위의 논문, 106쪽)
오스트롬은 커먼즈를 경제학적 시각과 마찬가지로 소비에 있어서 경합성은 있지만 배제성이 없는 재화라고 정의하였는데, 배제성이 없다는 것이 물리적인 재화의 속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들어 비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제불가능성은 특정 자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할 경우 생존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게 된다면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그 자원을 배타적으로 관리·이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특정 자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이 없거나 매우 적은 개인이나 집단이 그 자원을 배타적으로 관리·이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성은,「커먼즈 개념의 민사법적 소고」, 『토지법학』 37권 1호, 한국토지법학회, 2021, 87쪽.)
장소애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공공성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시도가 된다. 토포필리아의 구조는 객체 간 위계를 세우지 않으며 공유 공간 내 커머너들은 상호 관여하여 장소정체성을 공동 형성한다. 장소애의 중요한 성격으로 토포필리아는 협상력의 독점으로 일방적인 위력을 가하는 소유의 관점에선 결코 발현되지 못한다. 행위자에게 자리를 보장해주는 것, 이러한 배제불가능성이 소유라는 기존 관점에서 커머너의 확장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효과이다. 커먼즈를 배제불가능성의 입장에서 공생을 바라보는 것은 최근 생태문제를 ‘가이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성미산 데크 산책로’ 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노력과 ‘솔방울커먼즈’의 상상력 돋보인다.
성미산은 66m 높이의 작은 산이다. 인근 서대문구의 안산에 비해 1/20밖에 되지 않는 크기지만 멸종위기 종인 새호루라기, 파랑새 등을 비롯해 동·식물 40여 종의 터전이다. 지난해 3월 아카시아나무 100여 그루가 굴삭기로 제거되며 공사가 시작되었다. 주민들 ‘생태계 파괴’라며 반발하였고,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다. 협의를 위해 민·관협의체가 5개월간 논의하였지만, 결국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등 보행약자도 편리하고 안전하게 숲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숲의 공익적 기능을 확대하겠다고 밝히며 데크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관의 입장이 되돌아왔다.
성미산 공원 데크 설치 공사
“고목들을 잘라낸 자리에 토종 묘목들을 심겠다는데, 지금과 같은 숲이 되려면 20~3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며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업을 진행한 데 대해 주민들이 몹시 화가 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성미산에는 너구리 같은 네발짐승은 물론 솔부엉이 같은 천연기념물, 멸종위기인 새호리기, 파랑새 등 관찰된 새만 40여종에 달한다. 이렇게 나무를 베면 생태 교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뒷산 고목 100그루 뽑아낸 지자체의 식목일」, 한겨레21, 2021. 04. 05 수정, 2022. 04. 28 접속,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989590.html)
장애인 이동권과 데크 설치
「성미산 무장애숲길 조성 “숲의 공익적 기능 확대”」, 장애인신문, 2022. 02. 15, 2022. 04. 28 접속, http://www.welfare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80495.
하지만 숲을 생각하는 일은 삶의 자리라는 측면에서 인간 커머너와 파랑새·너구리·아카시아나무 등 비인간 커머너 사이의 협상을 지속하는 것을 뜻한다. 협상력을 지닌 커머너의 확장은 인간 커머너뿐만 아니라 비인간 커머너의 행위력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커먼즈의 배제불가능성은 테이블을 넓히면서 시작된다. 위의 사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대립하는 두 입장 사이의 쟁점이 공유공간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참여 커머너의 확장과 제한인 것이다. 공공성은 모두를 아울러야 한다는 비어 있는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시급함과 당면성이 반영되어야 할 가치 차등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차이를 논할 수 있는 협상자의 기준이 선재되어 있다면, 공유재의 배제불가능성 원칙은 허울 좋은 토대로 남을 뿐이다.
‘솔방울커먼즈’는 송현동 부지를 커먼즈의 상상력으로 사유하고 오동나무를 ‘주민 없는 주민센터’의 주민으로 소환한다. 오동나무를 숨탄것으로, 행위성을 지닌 객체로 원탁에 앉아 커먼즈에 참여를 상상하는 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행위자-오동나무를 인정하는 일이다.
주민 없는 주민센터
솔방울커먼즈는 “땅을 사고팔 권리는 땅문서의 주인에게 있지만, 땅의 이용과 개발은 더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땅은 오롯이 땅문서 주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지구,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사고팔고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쓸 것인지를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이 땅을 함께 가꿔나갈 이들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솔방울커먼즈, 주민 없는 송현동에 ‘주민센터’ 개관했다」, Landscape Times, 2020. 11. 2, 2022. 04. 28 접속, http://www.la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36646)
숨탄것
‘숨'은 단순히 생화학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자-행위성이다. 비인간 유기체에도 숨이 깃들어 있음을 알린 우리말 ‘숨탄것’이 있다. 숨탄것에는 인간중심주의의 한계가 엿보이지만, 비인간 유기체에게 행위력을 재분배하는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자연과 역사의 이분법이 안개처럼 자욱하다. 역사의 거대한 외연이 우리가 지구와 상관적 우주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인간 목소리에게만 증언을 맡긴다면 오늘날 생태위기는 헤아려지기 어려울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지를 다시금 바라보았을 때 토지 문제가 단순하게 소유와 분배의 문제만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우리 전통에서 토지(신社)는 인간 행동의 단순한 배경이나 환경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토지를 믿고 기리고 뫼시며 인간은 지구에 거주한다.
커먼즈의 상상력에 사물과 장소애를 덧대었다. 토포필리아를 통해 커머너의 확장을 기대하는 것은 장소애가 행위자 사이의 위계를 역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장소정체성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형성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생태 문제는 더 이상 유기체-행위자만으로 쉬이 접근하기가 어려울 만큼 복잡해졌다. 생태위기라는 개념 속에는 행성차원의 시사점이 존재한다. 지구에 거주하는 객체들에게 지구는 하나의 대지로 그 속에서 관계(커머닝)를 이룬다. 행위력을 재분배하는 커먼즈의 정치는 어쩌면 공유 가능한 민주주의란 상상력의 마지막 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기 위해 비인간 객체가 필요하며, 장소정체성은 객체적 정체성이라 부를 수 있다.
귓바퀴를 쓸어내릴 때 들리던 소리가 소라의 귓바퀴서 들리고, 어느 것도 겨울과 닮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을 겨울 이미지라고 부릅니다. 오늘 갑자기 겨울 시를 찾고 싶었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겨울 시를 쓰고 싶었지만, 이미지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유일한 이미지는 자신의 이미지라네요. 나는 글을 쓸 때 늘 망설입니다. 이미지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 읽기만을 반복할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강병우,「겨울시」, 2018년)
「겨울시」는 십 년과 이십 년에 걸친 사물을 그해 겨울에 불러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먼 날이 흘렀다. 기억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태에 묻혀 형성된다. 토포필리아는 사물과 공간을 ‘우리’란 적극적인 관계로 구성한다. 더 정확히는 이 모든 것들이 객체들의 공(共)구성이므로 인간 역시 객체이다. 오히려 객체이기에 우리는 공유(共有)로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