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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Nov 23. 2022

[어떤 노트] 커먼즈와 접근권

「장소애: 일제식민기의 공원과 토포포비아」를 보층하며

토지를 점유의 관점이 아닌 다른 대안적 시선 아래에 놓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이 시도는 토지를 소유에 근거한 소유공간(私有화)과 사용에 대한 사적공간(私的화)을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화 개념은 일제식민기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신고제 조사로 진행하여 수많은 공유지를 사유화 하여 사유재산 개념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사유화는 배타적 권리 행사하는 소수(일본 사람 또는 일부 특권층)에게 장소가 귀속되어,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농민 커머너는 장소와 분리된 주변인이 전락하게 된다.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많은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대대손손 전해온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박탈당한다. 한순간 장소와 공유하던 유대가 끊어진다. 반면 ‘사적(私的)’화는 경합성은 있되 참여의 배제성은 없는 재화의 사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공유지에서 어떤 사적인 수혜를 취득 했을 때 나타나는 반감은 공유지의 사회안정망 기능을 도외시 하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오히려 커먼즈가 지닌 공공성은 배제된 커머너가 확보하기 힘든 최소한의 사적공간을 지켜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강병우, 「장소애: 일제식민기의 공원과 토포포비아」, 『정해지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히스테리안, 2022)

https://brunch.co.kr/@complexarea/33


지난 연구에서 행위자가 장소와 맺는 관계를 연구했고 장소-정체성을 정립시키는 최초의 마주침을 ‘토포필리아(장소애)’로 설명하였다. 행위자는 일정한 공간과 맺는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협상력을 부여 받는데, 이 상호부여의 장(場)을 커먼즈로 정의했다.  「장소애」연구에서 장소정체성을 형성하는 커먼즈/커머닝의 관계를 살펴보았고, 이 관계의 확대가 그간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행위자에게 행위력을 재정렬로 보았다. 새롭게 출몰하는 정치적 공간을 커먼즈로 정의하는 것이 지난 연구의 목표였다. 

위의 글에서 과제로 주어졌던 것은 공유지로 이해되는 커먼즈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형성―토포필리아―과 사유재산화로 대변되는 정체성의 해체 즉 ‘토포포비아’를 대별시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적공간과 사유공간을 단적으로 구분하고, 사적 공간은 커먼즈가 지닌 공공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임을 주장했다. 공통 경험이 전제되는 어느 공간에서도 행위자에게 최소한의 의미표출이 조건화될 수 있는 공간을 사적공간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개념은 「장소애」연구에서 보완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었고, 본 글에서 보충하고자 한다. 


이전 연구까지 장소를 단지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였고, 소여된 장소와 행위자의 관계 맺는 일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 전반에는 선(先)행위적으로 장소와 관계 맺는 커머너를 상정하고, 국민국가와 민족 공동체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논의 저변 속에 숨은 것으로 보인다. 상상된 공동체는 20세기에 파산을 맞이한 ‘장기 19세기’의 유산―자연주의적 인권―의 전제이기도 하다. 인권담론의 취약성은 인간이 약속된 특정 공동체에 속하지 못할 경우 ‘맨 인간’으로, 즉 벌거벗은 인간(호모 사케르)을 드러난다. 하지만 또한 속하더라도 약화된 ‘상상적 공동체’의 난점이 보여주듯 권리는 너무나도 쉽게 수거된다. 인권 담론의 이율배반성이다. 

“행위의 상호성을 뒷받침하는 정치-제도공동체로부터 분리될 때, 인간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제도공동체가 (구성원 상호 간의) 권리 형성을 뒷받침하고, 이 권리가 인간 주체의 형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리바르는 “인간(humans)이란 단지 자신의 권리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이 권리 및 인간주체 형성의 장인 공동체가 오히려 권리체계를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인간을 파괴할 수 있음을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보여 주었고, 이것이 제도공동체-권리-인간 간의 관계에서의 이율배반성이다.”(임미원,「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의 기초적 고찰」, 『법철학연구』 제22권 제1호, 한국법철학협회, 2019, 223-224쪽)     


아렌트는 이러한 인권 개념의 난점을 지적하며 특정한 권리를 요구하기 전에 조건으로서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권리를 가질 권리’는 정치적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권원성을 지시하며 아렌트에게 행위란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공통 형성되는 공동성에서 비롯된다. 실존의 출발점이 되는 정치적 공간을 가질 권리,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의미를 표출할 수 있는 출현의 공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제약되지 않는 말로써 새롭게 시작하는 자유(freedom as new beginning)가 상상된 장소정체성보다 앞서서 문제시되어야 한다. 

「장소애」 연구가 놓쳤던 것은 권원성에 기반한 행위력을 도외시하고 이미 선제적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토대로 전개했었단 점이다. 그러다 보니 커먼즈의 공공성을 논하는 맥락에서 평등한 구성원 간의 상호 행위성이 적절하게 주목받지 못했다.  「장소애」연구는 사적공간을 가질 수 있는 권리, 비인간 커머너의 협상력을 재정렬 하여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권리-접근의 틀을 짧게나마 예고할 뿐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구체적인 행위 이전에 지녔다고 가정되는 추상적인 자연법보다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와 새롭게 시작하는 자유(freedom as new beginning)를 의미가 체현하는 출몰지(커먼즈)와의 관계 아래 두어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맞게 권원성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잘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요구가 침묵하지 않는 시급성의 목소리로서 ‘접근권’을 살펴볼 예정이기도 하다. 

접근권은 일반적으로 물리적 환경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진입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지만, 의미가 체현하고 구체적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에로의 접근이라는 포괄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자 한다. 

“‘접근권’이란 장애인이 이동에 필요한 보행로 등 도로·지하철을 포함한 각종 교통수단에서부터 정보통신시설 및 주거 등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생화을 하면서 반복적으로 이용하는 필수적인 생활시설에 지장없이 자유롭게 접근·이용할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접근권은 주거공간·도시공간·교통시설 등에 대한 접근을 의미하는 ‘물리적인 환경에의 접근권’과 문화, 미디어, 웹 등에 대한 접근을 의미하는 ‘정보와 통신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는 개념이다.”(박창석,「기본권으로서의 장애인의 이동권」, 『법학논총』 38권 4호, 한양대학교법학연구소, 2021, 84쪽)  


법제적-실정적 의미에서 이해되고 있는 접근권을 근본 권리로 재설정하는 것을 소기의 목표로 하고 있다. 소수자정책연구자 변재원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접근권’을 자기존중과 연관 지으며 붕괴되지 않는 삶의 근본권리로서 접근권을 설명하고 한다. 

 “접근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자기 존중이 가능한 사회를 도출한다. 스스로 드나들 수 있고, 도움을 구걸하지 않고도 밥 먹을 수 있는 권리의 실현은 곧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붕괴되지 않는 삶을 꿈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접근권과 자기존중」, 한겨레21, 2022. 08. 03 수정, 2022. 11. 13 접속,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8020300045)     


단순히 접근권을 인프라와 정보에 대한 이용·접근의 시선에서 본다면 ‘모빌리티’와 관련된 다면적 논쟁의 지도를 쉽게 포착하지 못한다. 모빌리티는 사람, 인간, 재화, 정보 등 물리적 이동뿐만 아니라 사상과 이념 같은 추상적 층위에서의 이동성도 포함하고 있다. 도시환경과 정보통신의 인프라가 빠르게 구축되면서 더 이상 모빌리티 권역 바깥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도시-국가-세계가 하나의 모빌리티 단위로 묶이면서, 우리 사회 전반은 모빌리티의 패러다임 전환을 겪고 있는 셈이다. 이같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모빌리티가 능력주의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 방향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또한 ‘노마디즘’이라 불리는 유목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선이 증대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와의 유대관계는 사람과 자본을 동원하는 다양하고 새로운 수단을 제공하고, 사회 조직들이 민족-국가의 영역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하나의 도전인가? 또는 앞서 토론한 견해들을 검토해볼 때,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의 출현은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와 일치하는가? 디아스포라는 시장 침투를 위한 또 다른 도구인가, 아니면 정치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방법인가? 디아스포라의 개념이 동질성과 본질주의를 비판하는 데 만족해야 할 때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그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인가?”(비린더 S. 칼라 외,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정영주 옮김, 에코리브르, 2014년, 54쪽)     


더 이상 이주와 이동의 문제가 단순히 내몰림을 뜻하지 않고, 그와 비슷하게 정주(定住)가 항시 중심과 위계를 상징하지 않는다. 두 개념이 변혁의 레퍼런스로 기준하지 않고 오히려 모빌리티-자본주의-글로벌 네트워크 사회에서 중요한 능력주의의 기재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 모빌리티 능력의 증대란 곧 객체(사람, 인간, 재화, 정보 등)의 배치도 안에서 인프라의 제한 없는 접근을 뜻하며, 부동성(immobility)은 단지 모빌리티―능력―의 부정태나 결여가 아니다. 

 “모빌리티는 대체로 다른 것들의 모빌리티를 희생시키면서 이동하는 다양한 사물들의 능력을 의미한다.”(카타리나 만더샤이트 외, 『모빌리티와 푸코』, 김나현 옮김, 앨피, 2022년, 87쪽)     


이 사회에서 능력의 부재로 읽히는 부동성은 변화에 대한 부적응, 게으름, 의지박약, 수혜자로 (장소)정체성화된다. 그러나 오히려 정지를 경험하는 감수성 즉, 정지에 대한 고찰이 권력과 배분이 주입되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임모빌리티가 모빌리티 담론의 가려진 설정값이란 사실과 정지에 대한 감수성은 접근권이 단순히 시설과 혜택의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움직임의 ‘중지’를 즐기거나 견뎌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정지 상태가 존재 자체의 논리, 역학, 정동적 자질, 그리고 ‘잠재력’(적어도 항상 정지의 중심에서 발아하는 움직임의 경우) 또는 ‘생산성’(학문적 훈련처럼 어떤 과정을 심화하는 경우)을 찾는다는 의미이다.”(카타리나 만더샤이트 외, 『모빌리티와 푸코』, 김나현 옮김, 앨피, 2022년, 40쪽)     


접근권의 성격을 다시 정리하자면 첫째 공동경험의 공간적 최소 단위로서 커먼즈/공동체로의 진입 권리다.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 공동체 내에서 협상력을 지닌 하나의 구성원으로 가지게 될 필요조건이며 권리를 근거 짓는 평등(isonomia) 개념의 실현조건이 된다.

 “이소노미아적 공동체의 개인들은 어떤 배제나 유보-전제 없이 공영역 내에서 발언하고 새로 시작할 권리를 상호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가 충족된 상태이다. 즉, 이소노미아란 권리를 가질 권리(권리를 요구할 권리)에 전제된 제도적 형상(이상)과 같다. 자연적 불평등(차이) 상태의 인간들은 이소노미아적 공동체에서 비로소 권력이나 권위,지배, 불평등에서 벗어나 공영역에서의 평등과 자유에 접근할 수 있다.”(임미원,「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의 기초적 고찰」, 『법철학연구』 제22권 제1호, 한국법철학협회, 2019, 224쪽)     


 둘째 오늘날 모빌리티 능력에 대한 강조가 그것의 결손이라 여겨지는 부동성―예컨대 장애와 홈리스―을 행위성 박탈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동성 자체가 부동성에 조건화되어 있단 사실, 모빌리티 사회의 화려한 겉면이 접근권이 제기하는 권원성을 가리고 있다. 접근권은 ‘부동성’을 경유해서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위성이 박탈됐다고 여겨지는 임모빌리티의 출현은 공동체 공간 자체를 문제화한다. 

정치 공간의 출현을 문제화하는 힘을 접근권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정치테제의 초월론적인 조건이 된다. 출현의 장소는 타자와의 조우가 예견되는 곳으로 어떤 마주침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의미 발생의 선험적 조건이자 그 자체가 의미의 영도이기도 한 이곳을 민주 연구자를 따라 ‘보이드’라 정의한다. 

 “그 '비어 있음'이 단순히 불가해성을 의미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하기는 했습니다. 타자가 불가해 하다는 이야기, 당신은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우주라는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또다시 반복하는 것에 우리의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보이드는 바로 그 미규정된 것을 위한 공원, 비고정적인 것들이(이해나 인식이라는 전통적 관계 모델로 나아가기 이전의 국면에서도) 부유하다가 서로 마주치기도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민주, 「The VOID」, 2022.)     


그의 정의에 따르면 보이드 공간은 의미의 외부나 무를 상징하기보다 출현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재배열과 마주침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前)주체적 형성 과정과 신비주의의 베일이 덮여 있는 사물에 대한 ‘놀라움(θαυμάζειν)’이 여전한 곳이기에 이곳에서 반복되는 것은 관계의 전도, 전복 그리고 변환이다. 예컨대 변재원 연구자의 렉쳐 퍼포먼스《목발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에서 주체-객체라는 존재론적 지위가 ‘고정 주소’가 없음을 시사했고, 이 둘의 위계를 행위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단단했던 토대가 곧 일시적인 규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은 역전이라고 부를 것도 없다. 이 인식론 근저에 놓인 사실로는 ‘객체’가 유일하며, 주체는 보이드에서 객체들의 부딪침과 마주침의 행위력의 교환에서 형성된다. 보이드의 초월론적 조건 아래서 정치적 공간의 최소단위인 커먼즈가 출현한다. 커먼즈는 커머너-행위자들 간의 상호 행위성 교환의 결과다. 

 “커먼즈(commons)를 공유된 자원과 공동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통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한 실천이라 이해한다면, ‘커머닝’은 새로운 커먼즈를 만들려는 일련의 과정과 노력이라 할 수 있다.”(강병우, 「장소애: 일제식민기의 공원과 토포포비아」, 『정해지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히스테리안, 2022)     


오늘날 커먼즈는 지엽적인 번역을 넘어 하나의 권리로 이해된다. 최초의 연구가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토포필리아/토포포비아―에 따라 달리 형성되는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이후 접근권에 대한 연구에서 장소애가 전제하고 있는 커머닝을 미시적인 차원에서 다뤘다. 이렇게 장소-정체성의 형성과 접근권을 ‘권리를 가질 권리’인 권원성으로 이해한 작업으로 커먼즈를 권리 공간의 출현으로 정의하는 밑거름으로 쓰고자 했다. 

 “커먼즈(commons)’라고 하는 용어는 한국어로 ‘공동자원’, ‘공유재’, ‘공유’, ‘공유지’, ‘공통체’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지만, 커먼즈에 대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그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커먼즈에 대한 연구자들 각자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고, 커먼즈라는 용어가 명사이자 동사이기도 하여 한국어로 번역이 쉽지 않은 것에 기인하기도 한다.”(김성은,「커먼즈 개념의 민사법적 소고」, 『토지법학』 제37권 제1호, 한국토지법학회, 2021, 82쪽)     
 “커머너(commoner)라고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산과 바다의 나무나 물고기 같은 자연환경, 혹은 사회제도와 같은 자원을 공동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면서 함께 누리고 있을 때, 그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자원 사이의 관계(커머닝(commoning), 그 공동으로 향유하는 자원 그 자체, 혹은 사람의 자원에 대한 권리를 통틀어 커먼즈라고 하는 것이다.”(김성은,「커먼즈 개념의 민사법적 소고」, 『토지법학』 제37권 제1호, 한국토지법학회, 2021, 82쪽)      


다소 무리일 듯해 보이는 이러한 연계는 공공성을 단순히 몰개인적인 공유가치라고 여기는 기존의 이해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했다. 이 테제의 인식론적 근간이 되는 민주 연구자의 보이드 개념은 결코 개인성이 삭제되거나 쏟아낸 텅 빈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안점은 정체성이란 행위성에 기반한 커머닝 효과라는 것이지 ‘고정주소’를 지닌 본질도, 비어있는 추상적-형식적 주체도 아니다. “인식론 근저에 놓여 있는 사실”로서의 객체는 행위의 측면에서 출몰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란 사실이다. 

 민주 연구자는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의 ‘욕망’을 지칭하기 위해 ‘염(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욕망, 무의식, 리비도, 충동, 정동 등 몇 가지 대안 개념이 있었지만, 서구의 정신분석 색채와 (생물학적)에너지를 연상하는 단어 고유의 분위기 탓에 전달의 어려움이 있었다. 불교 개념의 ‘염’은 이러한 우려를 우회하고 오늘날 한국에 보다 적절한 맥락과 정서를 전달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염(念): 주관인 마음이 객관인 대경(對境)을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여 두고 잊지 아니하는 정신. 과거 일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행하여서 마음으로 객관 대상을 분별할 때에 반드시 존재한다.(출처: 표준국어대사전)


공공성을 위와 같은 커먼즈로 이해할 때 비로소 공공예술《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를 출현시킬 수 있다. 오드라데크를 출몰하는 객체 즉, 그 자체가 이미 커머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넝마주이-예술가’ 형상으로 재구성하는 비평적 작업에서 밝혔다. 공공예술은 이러한 정치적 공간의 출현에 깊이 개입이 되어 있으며, 예술 자체가 커머닝 효과라는 것을 시사했다. 이러한 비관계에 놓인 오드라데크-타자와 조우하기 위해 허구/픽션/서사가 매개로서 자리하며, 공공예술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는 우리의 구체적 행동이 매체가 되는 보이드-작품을 구성하는 것을 어렴풋한 시아에 두고 있다. 

 “넝마주이는 예술이 그러하듯 자본의 질서를 비틀어 흉내 내 상품 질서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보이드는 자본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되고, 그곳에서 넝마주이 예술가는 쓸모없어 보이는 욕망을 관철하며 보이드를 만들어 낸다. 보이드는 예술의 장소이자, 넝마주이의 작업장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와 도시가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시대에 예술과 넝마주이는 넓은 영역에서 겹쳐진다. 그들은 자본이 주인인 땅에서 건진 재료로 자본의 쓸모를 벗어난 것을 생산하고, 그것을 자본의 시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사회를 더 넓은 존재들의 것으로 변화시킨다.”(민주, 「탈취법: 추의 점유」, 『정해지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히스테리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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