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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강의]『불가능한 애도』

4월 28일 서울 동대문구 '무아레 서점'에서

by ComplexArea

서울 동대문구 장한평에 있는 '무아레 서점'에서 신간 『불가능한 애도』의 내용으로 강의했습니다.

1시간 정도 강의를 진행했고 이후에 질의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해당 강의의 녹취를 요약했습니다. 관련해서 궁금하시거나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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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는 무엇일까. 아주 커다란 슬픔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슬픔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강의는 이 질문으로 시작했다. 애도는 흔히 개인적인 상실을 넘어 사회적 재난, 참사의 차원에서도 호출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물음은 남는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강의자는 이 물음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 차원까지 확장하며, '애도의 불가능성'을 중심 주제로 삼아 서술을 이어나갔다. 정신분석은 애도를 하나의 '작업'으로 규정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상실을 경험한 주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리비도를 상실된 대상에서 철수시켜 점진적으로 상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애도로 보았다. 이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심리적 반응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텍스트 안에서도, 프로이트는 멜랑콜리를 구분하면서 이 도식을 흔들기 시작한다. 멜랑콜리는 상실된 대상을 외부로 분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 안에 끌어들여 스스로를 파괴하는 '병적' 상태다. 이후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된 죽음 충동의 개념은 이 구분을 더욱 흐리게 만든다. 주체는 상실을 극복하는 대신 반복적으로 고통을 재현하며, 어떤 회복도 완결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애도는 더 이상 완성 가능한 작업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과업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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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멜랑콜리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강의는 재현의 문제로 넘어간다. 우리는 상실된 대상을 단순히 되살릴 수 없다. 상실은 복제되거나 복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했던 대상은 차가운 기호나 기념물, 복제품으로만 남는다. 블랑쇼의 사유처럼, 애도는 실재의 일부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견디는 일이다. 주체는 잃어버린 대상을 상징계 안에서 재현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원본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다. 상실을 재현 과정 자체가, 살아남은 자에게는 죽음의 위협과 함께 찾아온다. 강의자는 이 점을 강조하며, 애도가 근본적으로 상징계의 작업임을 지적했다. 실재의 상실은 상징계 안에서만, 복제물과 기표(대상a)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접근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랑했던 대상을 문자로, 기호로 남긴다는 것은 결코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충만한 실재를 온전히 되찾고 싶어 하지만, 애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불완전한 흔적뿐이다. 이 지점에서 강의는 애도가 언제나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데 주목했다. 주체는 상실된 대상을 통해 과거로 복귀할 수 없으며, 오히려 끊임없이 부재를 다시 살아가야 한다. 이 애도의 불가능성은, 단지 상실의 고통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상실이라는 사건 자체가 완전히 상징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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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이어서 시간성의 문제로 넘어갔다. 상실을 경험한 주체는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이탈하게 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규격화된 사회적 시간은 누구에게도 온전히 맞지 않는다. 강의자는 이 은유를 빌려, 언어와 규범이라는 상징적 체계가 주체의 고유한 몸-존재를 재단한다고 지적했다. 신경증적 주체는 이 억압된 부분을 의식적으로 포착할 수 없게 된다. 상실을 경험한 존재는 표준화된 구조 속에서 본래(실재)의 대상 맞출 수 없으며, 항상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어긋난 시간 속에 존재한다.


이 어긋난 시간은 림보의 상태와도 연결된다. 구원받지 못했지만 처벌받지도 않는 이들이 머무는 림보, 그것은 시간의 완성 이후에도 남아 있는 어떤 기다림의 시간이다. 애도는 이 림보적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강의자는 "닉 오브 타임"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설명했다. 닉, 아슬아슬하게 딱 맞춘 듯하지만 실제로는 어긋난 시간. 상실의 경험은 우리를 이 닉의 시간, 즉 영원히 맞춰질 수 없는 간극 속으로 밀어넣는다. 따라서 애도는 항상 이미 너무 늦어버린 동시에,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른 상태로 남는다. 우리는 과거의 충격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서, 무한히 어긋나는 시간 속에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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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보의 유예된 시간 속에서 윤리의 과업은 무엇일까. 그것은 번역 혹은 글쓰기의 문제로 이어진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강의자는 번역을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질서 사이에서 어긋난 흔적을 남기는 작업으로 설명했다. 번역은 결코 원본을 재현할 수 없으며, 오히려 번역하는 순간마다 실패를 반복한다. 이 실패야말로 번역의 진정한 윤리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타낼 수 없는 것을 실패하면서 기록하는 행위다. 강의자는 블랑쇼와 아감벤의 사유를 인용하며, 글쓰기와 번역이 부재, 어긋남, 실패를 끌어안는 윤리적 실천임을 강조했다.

번역과 애도는 이 점에서 닮아 있다. 가버린 이를 향한 말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며, 남는 것은 오직 실패한 흔적들뿐이다. 우리는 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 실패 속에서 애도하고,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 번역가는 결코 완전한 의미를 옮길 수 없으며, 애도하는 자도 결코 상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옮기고, 계속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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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마지막으로 상속과 유산의 문제로 나아간다. 상속은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과 응답의 과정을 포함한다. 죽음은 교환경제를 초과하는 사건이며,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전적인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 고해종의 말을 빌리자면, 애도는 무한한 타자에 대한 전체적 환대가 아니라, 유한성의 반복을 통해 무한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하면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도하면서, 무한히 유한해야 한다. 애도는 하나의 종결이 아니라, 최악의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운동이다.


결국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끌어안고, 상실을 끌어안고, 그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잔존은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삶의 형식이며, 애도는 이 잔존의 윤리를 배워나가는 실천이다. 『불가능한 애도』는 우리에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무한한 과업을 포기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슬픔을 완성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슬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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