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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알지못해서...?

진로정체감과 진로의사결정의 뫼비우스  

최근에 만났던 은아씨는 ‘내가 누인지 알기’를 기다리면서 지난 2년간의 시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은 취업을 했지만 금 그만두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잘할 수 있는 일, 적성에 맞고 재미있는 일이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텐데… 졸업할때까지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더라도 확실한 감이 올 때 그때 시작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완벽하게, 확실하게, 실수없이 결정하고 싶다는 마음에는 ‘아직 나는 나를 잘 몰라’ 라는 불신감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을 해서 뒷감당을 해야 하는 일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엄한 일을 벌였다가 수습을 못하면 안하느니만 못하니까 조급해 질때마다 자신을 타일렀다. 나중에 잘못되서 후회하기 보다는 뭔가 확실해지면 움직이자 다짐을 했고 친구들의 갑갑한 직장 생활 이야기와 힘겨운 사회생활 이야기를 할 때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한편으론 아직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자신이 좀더 나은 상황이라고 마음을 다스렸다.

은아씨는 ‘나를 알기’ 위해 홀로 떠나는 제주여행도 다녀보았고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자격증 공부 해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확실한 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친구들이 지나가며 하는 말에 심하게 흔들렸다.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고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아 마음은 하루에도 열 두번씩 급행 열차를 탔다. 이제라도 취직을 해야 되나 싶다가도 주변에서 이왕 늦었다면 차라리 공무원 준비를 하거나 전문 자격증 준비를 하라기에 급기야 노무사 학원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짧은 기간 지인들의 추천으로  작은 회사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첫날부터 야근을 해야 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다음날 바로 그만두기도하였다. 출근 첫날부터 밤 10시까지 퇴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저히 견뎌낼 자신은 없었다. 은아씨의 마음은 초조했지만 뭔가 달리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 것 같은데 주어지는 현실은 불품이 없었다.


요새는 친구들의 SNS를 볼 때마다 가슴이 쿵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비슷했던 애들인데 각자마다 자기 자리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은아씨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하루는 은아씨보다 한참 뒤졌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친구의 변화된 외모도 외모였지만 어느새 작은 네일 샾의 대표가 된 친구가 자기가 번 돈으로 새로 샀다며 올려둔  자동차를 보면서 은아씨는 자기 자신이 너무 보잘것 없는 것 같아  괜히 짜증이났다.


'저 애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확실하게 아니까….저렇게 살 수 있잖아!. '


생각할수록 은아씨는 더 답답해졌다. 나도 그 친구처럼 기술을 배워볼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힘들게 공부를 하고 졸업을 했는데 이제와서 생소한 기술이라니... 너무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런 불편한 마음에 비교하는 마음까지 슬며시 고개를 드니 우울감이 밀려왔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받아 줄 것 같지 않아 두려웠다.  


'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면 저 애 처럼 살 수 있는데 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거지?'  이런 저런 사태를 겪으면 은아씨 스스로가 내린 진단명은 ‘소심한 팔랑귀’였다.

‘내가 소심한 팔랑귀라서 그렇지 뭐 ’


어찌된 일인지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갔다. 졸업 하고 나서 딱 6개월만 시간을 갖자고 시작한 공백기가 2년이 흘러갔다. 이렇게는 안될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찾아뵌 교수님은 은아씨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취업할 수 있는 중소기업 한 곳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마저도 확실한 느낌이 오지 않았다. 확실한 느낌이 없으니 가타부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조금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지 않았다. 집에서도 가깝고 교수님도 괜찮은 곳이라고 하니 마음이 약간 기울기도 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않은 회사에다가 무슨 일을 하는 지도 잘 알지 못하니 결정은 너무 어려웠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이상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변명을 하자면 은아씨도 마냥 놀았던 것은 아니다. 간단한 아르바이트도 간간히 했고 동네 편의점에서 주간 알바도 했지만 진로 문제 앞에서는 늘 서성거리기는 상황이었다.


결국 은아씨가 스스로 붙인 두번째 자기병명은 ‘결정장애’ 였다.

‘전 팔랑귀에 완전 결정장애거든요……’


그녀는 친구들이 다니는 회사들을 부러워했지만 자신이 할 만한 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끊임없이 불안하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불안하다는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한나머지 단 한발도 나가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게 중요하다’라고 해서 의사결정을 미루고 미뤘는데 고작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팔랑귀에 결정장애로 결론이 나면서 진로문제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은아씨는 이후에도 몇번이고 와서 답답하다고 했으나 그 이상으로 진척이없다.


어떤 대안에도 비관적인 전망이 먼저 튀어나왔고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나쁜 일들을 먼저 이야기했다. 이전에 경험한 일 경험들이 은아씨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도 있지만 그녀에게는 현실 어디에서도 자신이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무엇인가가 나를 향해 찾아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향해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워했다.


‘확실한 것이 있어야 ‘라는 생각이 은아씨의 상상력을 갉아먹었고 일과 관련해서는 악마의 편집 같은 나쁜 전망만이 그녀의 머리속을 지배했다. 은아씨는 도돌이표 같은 생각 그물망에 갇혀 끝없이 갈등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려고요.’ 라며 2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결국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된다’는 말이 일종의 부도수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두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고민해 온 시간들이 무용지물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를 알기 위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나를 알자’라는 목표를 두고 용맹 정진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불확실할 뿐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비약적으로 높아지지도 않는다.


어찌 어찌해서 나란 사람에 대해 조금 알았다고 쳐도 그 사이 나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도 동시에 변화하니 ‘나 자신에 대한 감을 조금 높여 놓았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고 역할이 바뀌고 나에게 요구되는 주위의 기대가 바뀌면 또 다시 나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지기 일상이다.  


진로상담과정에서도 ‘나를 아는 것’은 중요한 주제이고 매 순간 강조하는 바이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다고 ‘나를 알자’고 공허한 구호를 외치고 머리로 고민해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은아씨의 경우를 두고 그녀의 답보하는 상황을 평가하거나 허송세월을 했다고 탓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선 주어진 한가지라도 가능한 대안에 두 발을 다 담궈 보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물론 이렇게 되려면 그 전에 은아씨를 가로막는 심리적 장애물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진로에서 말하는 ‘자기 개념’은 ‘진로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나란 사람의 정체성은 단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기도 하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형성되는 역동적이며 변화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여러 측면의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Vondracek, 1992). 다시말해 개인을 둘러싼 맥락과 실질적인 경험을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하기 어렵기에 개인의 내러티브 속에 펼쳐지는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과정이 생략된다면 자기 개념인 정체성에 접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 그리고 개인이 편집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 것 같다는 희미한 개념을 형성해 나가는데(Savickas, 2000) 그러려면 반드시 실질적인 경험을 살펴야 하며 타인으로 부터 적절한 피드백과 자신의 경험을 씨줄과 날줄로 돌아보는 작업이 요구된다(김이준, 2019).

즉 ‘나를 아는 것’도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이 없다면 얻을 수 없는 일이다. 은아씨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으려면 ‘구체적인 경험’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경험에 접촉할 수 있는 체계적인 개입이 요구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매우 많은 경우였다.


은아씨의  ‘행동하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일이 진로결정보다 훨씬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비유적으로 집 앞에 눈이 쌓여 길을 걸어갈 수 없다면 우리는 집앞에 쌓인 눈부터 청소 해야 한다. 그래야 길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서야 갈지 말지도 결정을 하고 간다면 어디로 갈지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수북히 쌓인 눈 위에서 어딘가로 순간 이동을 하고 싶을지라도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은아씨의 말은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은아씨가 갖고 있는 ‘정답’이 오히려 그녀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알아야만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어떤 의사결정 이전에 완료해야 하는 과업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과정속에 서 끊임없이 나와 주변 그리고 나와 환경이 소통하면서 점차 명확지고 더 나은 이해가 생겨나게 되었을 때 더 나은 의사결정으로 인도되는 연쇄이자  순환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형성되는 자신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총체적 감각이다.

 

‘내가 누군인지 명확히 아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확실한 감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인식이 다소 높은 편에 속하는 경우나 다소 낮은 편에 속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내가 누구인지 아는’것은 평생의 화두로 붙들고 늘어져도 확연히 알기 어렵다.  


더욱이 갓 스무살이 넘은 학생들이 와서 이런 말들 때문에 지나치게 위축되고 완벽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움츠려 있다면 그런 말은 다 접어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라고 말 해 주는 것이 좀더 자기이해로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혹은 그럴 수 있도록 믿어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먼저이다.


우리는 자기 이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자기이해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사건에 직면하고 그 과정을 거쳐가면서 덤으로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내가 이런 일은 좋아하는 편이었네. 이런 일은 싫어하네, 이런 일을 정말 힘들고 잘하지도 못하네' 등 계획하지 않은 의외의 장면에서 자기에 대한 이해가 높아짐을 알게 된다. 이러한 축적된 정보들이 쌓이고 쌓이면 드디어 새로운 선택지 앞에 섰을 때 자기에 대한 감각을 빌어 의사결정의 순간에 책임을지고 결정을 해 보게 된다. 점차 나아지는 자기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급기야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라도 나아갈 배포와 용기는 또 한참 지나야 생겨나기도 한다.


‘완벽에의 충동을 내려놓고 것도 배우는 과정이다’


어차피 정답이 없다면 내가 가는 길을 정답으로 만들면 되지 라고 크게 생각해보아도 좋다.  


‘처음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구절을 암송해도 좋고 ‘까짓것 아니면 말고’ 와 같은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마음이어도 괜찮다. 불가능에 가까운 확실한 ‘자기 이해’ 부터되어야 뭐라도시작 하지라는 교과서적인 조언에 대한 집착은 잠시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먼저 뛰어 들어보자. 그 경험속에서 뭔가 깨닫게 되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 다름아닌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몇 년 전 참석했던 한 컨퍼런스에서 강단에 선 연사가 자신이 어떻게 창업을 했는지 이야기하다 말고 ‘먼저 저지르고 나중에 용서를 구하라'라고 적어둔 문장을 보여주었다. 그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만약 방황을 해야 한다면 철저하게 방황을 하라.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이 자기 이해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만성적인 의사결정의 어려움은 훨씬 심층적인 심리적인 원인일 때도 많다. 가족의 문제,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크나큰 실패사건, 뿌리깊은 죄책감, 과도한 수치심, 성격의 문제까지 그 맥을 짚어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런 원인들이 의사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전문적인 상담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야 한다’는 말에 지나치게 얽매여 오히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오류에 빠진 경우라면 이제는 좀 놓아주는 것을 어떨까?. 거친 바다로 향해를 떠나야 하는 사람이 파도를 완벽하게 다림질 한 후 출항을 하려면 영영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머로만 배워도 잘 해 낼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해야만 체득할 수 있는 일들도 있기에 자기 이해가 온전한 형태를 띄자면 어려운 것이다. 고민한다고 이루어 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기 이해란 머리와 몸의 협동 작품이고 실행과 숙고의 과정이 요구된다.


얼마전 나는 유튜브에서 ‘리아킴’이라는 댄서의 춤을 보고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멋지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했다. 영상을 보면서 리스펙 리스펙을 외치면 조용히 ‘락킹 댄스’를 검색해 보았다. 어떻게 추는 춤인지 너무 궁금해서 이번에는 블러그를 찾아 조용히 읽어 보았다. 아하…이렇게 추는 거구나…머릿속으로 충분한 이해를 했다.


몸에 대한 감각도 자기 이해의 일부인데 어리석게도 나는 춤을 글로 배워보려고 한 것이다.. ....


내 춤 실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지만 일어서서 리듬을 타고 흔들어보았다면 내 몸은 지금보다 좀 더 자유로웠을텐데 ...... 후회해도 너무 늦은 듯 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른다고 해도 괜찮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당장의 일을 해보면서 나를 발견해가는것이  나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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