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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조언은 사양합니다.

저는 되어가는 중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란 책에서 "방전이 아닌 누전"이라 표현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방전이 아닌 누전 " 인생의 어느 모통이에서 두꺼비집이 내려가본 사람만이 아는 그 경지.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쳐두고 한참을 머물렀다. 내가 심리학을 전공하고 상담을 전공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한 때 내가 공대생이였다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인생의 길이 여러 갈래라고 하지만 서른 초반까지도 나에겐 인생은 너무 어려웠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협소했고 마땅한 직업도 없었고 나를 아껴줄 연인도 없었다. 가끔 소개팅을 하곤 했지만 서른초반의 나이에도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죄 지은 사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였고 사랑도 거래처럼 이야기하는 세상에 분개하기도 했었다.  


진로가 꼬이니 누군가를 만날 상황조차 되지 못했고 뒤늦게 공부를 하니 데이트를 하러 나갈 시간도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으레 직업을 물어보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공부중’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까지 공부를 한다고요? 괜한 상상력을 보태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격에 무슨 문제가 있는거 아니야? 친척들은 수근거렸다. 

억울했지만 달리 변명거리도 마땅치가 않았다. 진로가 꼬여버려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한다고 하면 이제 시작해서 대체 뭘 할건데 라며 혀를 차를 사람이 많았다. 꼭 뭐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요…라고 하면 써먹지도 못할 공부를 왜 하는건데 라면 사람들은 더 흥분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거라도 해야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하지만 자격증 취득 공부도 아니고 전문직 공부도 아닌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다시 대학을 다닌다고 하니 사람들은 이상하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주변의 어른들은 결혼 적령기인 나이 꽉찬 아이를 왜 계속 공부하게 놔두는냐고 하면서 나의 부모님께 참견을 해왔다. 애들 말 듣지 말고 우격다짐으로라도 맞선을 봐서 ‘값떨어지기 전’에 치우라는 조언을 하곤 하였다. 나의 속을 뒤집는 표현이긴 하였지만 부모님들과 친척들이 고의로 나를 구렁텅이에 빠드리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분들 생각에 나이는 차고 내세울 것도 없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이라도 시켜놔야 마음을 놓을 수 있어 하신 말씀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귀를 닫고 침묵시위를 하곤 하였다.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창 기말고사를 봐야 하는 시기에 맞선을 보라는 연락을 받은 날 나는 난생처음 으로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기말고사 시험 봐야 된다고….공부할 거 많다고…’. 

부모님은 기가 차지도 않은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러서 주셨지만 서른 즈음의 내 삶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일과 결혼과 같은 인생의 발달과업이 엉망진창으로 어긋나고 있었고 어디서부터 해결을 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의 결혼은 우리 부모님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한번은 맞선을 보러 나갔으나 상대편과 나는 몇 마디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아직도 공부중’이며 불확실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서른 넘은 여자에게 세상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내게 직업을 물어보고 왜 계속 공부하는지 건성으로 질문하였다. 불안정한 일자리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며 설명을 했지만 그들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고시절 ‘좋은 대학이 미래의 남편을 결정합니다. ‘ 라고 하시던 한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진저리를 쳤지만 세상의 기준에 비교하면 나는 그냥 루져였다.  

학창시절 큰 문제를 일으켰던 적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부모님 말씀도 크게 거역한적이 없는 순한 아이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 꿈이 아닌 것들을 추격하느라 헛힘을 쓴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계속 열심히 노력을 했던 것 것 같은데 모든 노력이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당시의 나는 누군가 대놓고 나에게 ‘낙오자’라고 할까봐 한껏 눈치를 보며 숨어지내기에 바빴다.. 친척들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가기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아…나는 요새 무슨 일을 한다고 해야하지?’ 지금생각하면 웃기지만 오늘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을 할까?’ 그런걸 고민하는라 머리가 샐 지경이었다. 그리곤 가라앉은 기분을 벗어나는데만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번듯한 일도 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삼십대였지만 나는 ‘죽은 시늉’을 하는 느낌이었다. 세상과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주변인의 느낌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위축시켰다. 


친구들의 결혼소식이 들려오고 출산소식이 들려오고 승진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임 초대에 거의 참석을 하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기어이 나를 찾아내서 결혼식에 오라고, 그냥 가볍게 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가서 환하게 웃고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애써 나가지 않았다. 

언론사에 입사한 친구도 있었고 외국계 기업을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된 이도 있었고 교사와 같은 교육 전문직에 나간 이들도 있었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완성해 나가는데 나는 그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공학을 계속했다면 괜찮았을까? 그랬다면 더 행복했을까? 아니지 아니야….라고 머리를 흔들다가도 구질구질한 내 인생을 바라보면 화가 났고 아주 많은 자책을 했다. 나는 진로문제 투성이의 ‘문제적 존재’였다. 그래서 진로상담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상담실에서 서른 후반의 진희씨를 만난건  몇해 전 여름이었다. 

엷은 바다색 여름 블라우스는 시원하게 보였고 카랑카랑 하고 높은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연애와 진로 라는 상담신청서 상의 단어가 유난히 또렸히 보였다.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음.

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진희씨 였지만 활달한 성격탓에 그녀는 금새 상담에 적응하는 것 같았다. 진희씨는 ‘제가 주로 이야기해도 되나요?’ 라고 물어보고 나서 진로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진희씨는 한 금융회사 콜센타에 입사를 했었지만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지 않아서 입사 한지 5개월도 되기 전에 자발적인 퇴사를 했다고 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계속 전화가 울리더라구요. 하루에 거의 전화를 150통은 받은 것 같았어요. 너무 답답하고 약간 공황상태 비슷한 증상이 왔어요. 숨이 답답하면서 식은땀이 흐르는데 견디기가 힘들더라구요. 사무실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조금 나아졌지만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와서…이 일은 정말 아니다 라고 판단해서 그만두었어요. ‘ 


빠른 속도의 이야기는 롤러 코스터 같았다. 목소리도 크고 말도 빠른 진희씨는 나를 처음 만났지만 왜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는지 단숨에 설명해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뭘해야 하나? 그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은 거예요. 대학 때 전공했던 걸 다시 하기는 싫은데 갑자기 일이 없어지니까….이제 난 뭐지?  이런 생각이 든 거지요. ‘라고 하였다.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셨는데요? 라고 묻자 진희씨는 피부 미용을 전공했다고 하였다. 

‘피부 미용은 빨리 돈벌고 싶어서 제가 우겨서 선택한 거였어요. 처음엔 재밌었어요. 사실 졸업하고 실습 했던 회사에 취업을 해서 졸업할 때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빨리 취업한 사람이었고요’ 진희씨의 그 말에서는 남다른 자부심과 당당함이 느껴졌다. 


다들 취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너무 쉽게 일자리를 구해서 진짜 걱정이 없었는데 피부관리실에서 일을 할 땐 남들보다 잘하고 싶어서 항상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출근하고 그랬는데 동료들이 그런 진희씨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말을 슬쩍 곁들였다. 진희씨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는데 동료들과도 조금씩 불협화음이 있었고 그러던 중에 미끄러운 바닥에서 크게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입게 되었다고 하였다. 

‘피부 관리실에서 일을 하는데 팔이 부러졌으니까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 그래서 조금 쉬고 나서 회복되면 다시 돌아가야지 했는데 그걸로 끝이었어요. 


팔이 완전히 회복하는데 거의 1년 반이 걸리다보니 다른 일을 구할 수 밖에 없어서 금융권 콜센타에 입사를 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았고 실내 업무는 너무 가슴이 답답해서 지금 이렇게 다시 진로를 고민중이라고 하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했고 판매직 일도 했지만 이제는 나이도 있고 결혼을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에 조금은 전문적인 일을 준비하고 싶어서 상담을 오게 되었노라는 이야기었다. 


진희씨는 그 사이에도 길게 짧게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 왔기 때문에 실질적인 공백기는 별로 없었지만 해 왔던 일은 산만했으며 직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노라고 정확히 말하였다. 

직업을 하려면 피부미용쪽 일이 제일 낫겠지만 그길은 왠지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었다. 

이제라도 흥미와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싶은데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자니 막막하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하였다. 

‘당장 제일 어려운 점은 돈벌이가 없으니까 연애할 때도 돈도 많이 부족하고요. 남자친구도 아직은 기반이 없기 때문에 저도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하거든요.’ 

서른 중반이 넘었기에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두렵다는 말은 충분히 공감가는 상황이었다. 

혹시 알아본 일이 있는지 진희씨에게 물었다. ‘있기는 한데요….라고 그녀는 말꼬리를 흐린다. 


‘그게 어떤 일인데요? “ 라고 내가 묻자 진희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 저는 웃음강사가 되고 싶어요’ 라고 하였다. 웃음강사요? 오히려 되물은 건 나였다. 


‘네 ….전 정말 그 일이 좋을 것 같거든요. 방송에서 그런 일 하는 사람 본적이 있는데 제 적성에도 잘 맞을 것 같고요. 저의 활동적인 성향에도 잘 맞을 것 같고 제가 또 남 웃기고 이러는거 좋아하거든요.’ 

진희씨는 웃음강사 이야기를 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 직업에 끌리신다니 굉장히 신선하네요…’ 진희씨는 살짝 미소를 보이더니만 ‘ 그래도 막상 이런 직업을 해서 먹고 살수 있나? 그게 문제예요. 저는 관심도 있고 잘 할 자신도 있긴 한데요…이걸 진짜 시작해도 될까? 그런거죠. ‘ 진희씨의 남자친구 집안에서 바라는 며느리의 직업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고 진희씨의 부모님에게는 이야기조차 꺼내본 적이 없었고 친구들에게 웃음강사라는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미 배운 기술이 있는데 그거 다시 하라는 이야기가 제일 많았고 저도 마음이 살짝 흔들릴 때도 있어요. 솔직히 다시 그녀는 말끝을 흐린다. 


그래도 ‘ 저는 제가 막 리드하고 표현하고 그런 사람이거든요.’ 진희씨는 웃음 강사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지 신이 나서 또다시 한바탕 웃음강사 이야기를 한다. 체스츄어와 얼굴 표정까지 지으면서 웃음강의 하는 사람 모습을 흉내내기도 한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에 같이 웃음이 났다. 

그러다가 곧장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면 짜증 섞인 얼굴로 양미간을 좁히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투덜거렸다. 


진희씨는 지금 자기의 흥미와 적성과 가치들 위에서 다음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나가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슬슬 기반을 마련해야만 하고 안정성을 찾아 경제적인 독립도 해야만 한다고 채근하면 진희씨나 나는 한참 궤도를 이탈해서 우주로 날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인데 그 사이에서 힘들어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남은이 있었다. 


하지만 ‘탐색은 자유, 선택은 책임’


 우리는 그렇게 의기투합하여서 웃음 강사 라는 직업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해 나갔다. 웃음강사 교육과정도 알아보았고 자원봉사 로 지원도 해보았다. 실제로 암병동의 자원봉사자 보조가 되어 큰 웃음강사 옆에 작은 웃음강사로 현장을 뛰고 오기도 하였다.  그러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더 확실한 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선생님 저는 웃음 강사 하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전달해 주는거 자체가 너무 좋아요.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수업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여전히 제가 얼만큼 돈을 어떻게 벌수 있을까 그게 문제이긴 하지만….저 학원에서 가르쳐준 선생님이 우선 보조강사로 일할 수 있는 곳을 두어곳 소개해 주셨어요. 거기서 잘하면 어떻게 되겠지요? “

진희씨는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주머니에 돈도 없고 막막하기도 할 텐데 어떻게 저렇게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걸까? 


나는 그녀의 웃음강사라는 직업의 좋은 면만 보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싶어 또 여러 차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위험요소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진희씨는 오히려 그럴 순간마다 나를 설득하였다. 

‘선생님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어요. 이제 시작인데 배우는 자세로 하다보면 길이 열릴 거예요.’ 

이제는 진희씨가 나를 앉혀놓고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나갔다. 흥미니 적성이니 그런 말을 주어 담을 필요가 없어보였다. 나는 드디어 이제는 이제는 상담을 마무리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자존감’을 향상시키기 위한 해결책은 ‘실행력’과 ‘자기 조절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적혀 있던 어느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무언가를 실행하기 전 스스로 해낼 수 있을지, 실패하지 않을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실행에 옮긴다고 하는데 진희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제는 혼자서 잘 서있을 것으로 보이는 진희씨를 보는게 무척 좋았다.  


사무실에 근무할때 공황발작 비슷한 경험을 했고 이미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숙련된 일도  있었지만 진짜 도전하고 싶은 분야를 만났다면 두발을 담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만큼의 일들을 감당할 만큼 성장한 진희씨가 보였다. 

웃음강사를 하면서 또 다시 힘든 일을 만나고 갈등하고 괴로운 순간도 있겠지만 내게 목소리를 높여서 자신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진희씨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시작인데 욕심부리면 안되지요. 우선 몇군데 봉사부터 시작하구요. 아직은 제가배워야 되요. 그냥 조금씩 해보려고려고 전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상담실 문을 나서면 내게 한말이었다. 그렇죠. 진희씨…물론 그렇구말구요. 

우리는 눈빛이 마주쳤다. 그리곤 웃었다. 

언제든 상담이 필요하면 다시 와도 좋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입술 보호제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돌아갔다. 돈도 없을텐데….그런 우려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기쁘게 받았다. 


그녀가 나간 방으로 돌아와 나는 그녀가 사온 입술 보호제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따라가준 나의 보폭을 기억해 주는 듯해 고마움을 느껴 잠시 뭉클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쯤 어디선가 그 특유의 크고 높은 목소리로 웃음강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을 해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혼돈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나와 그리고 지금의 그녀에게 나는 이 말을 해주고 싶어졌다. 


‘우리에겐 우리만의 길이 있어요. 그걸 찾아보세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좋은 순간이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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