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제 흥미 알아서 뭐하게요?

젠더와 진로상담 (경력단절 여성과의 진로상담)

그날은 근무일이 아니어서 집에서 좀 느긋하게 쉬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객원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는 센터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 “김 선생님  진로상담 케이스 인데요. 좀 급해요. 내담자가 당장 오늘이라도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여서요. 혹시 오후라도 시간이 되시나요? “ 

소장님은 괜스레 미안하신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당장 상담을 하고 싶다는 내담자가 있는데 혹시 오늘 오후에 상담실로 출근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진로상담도 중요한 이슈를 다루긴 하지만 ‘당장 오늘’ 과 같이 촌각을 다투며 상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보니 궁금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유일까?  


우선 소장님의 다급함도 신경이 쓰였고 무엇보다 당장 오늘이라도 상담을 하고 싶다는 내담자의 상황이 궁금했다. 간단한 몇가지 사항만 묻고는 우선 알겠다고 하고 부랴 부랴 상담실로 달려갔다. 상담실에 도착해서 접수기록지를 보고 있자니 소장님이 슬쩍 들어오셔서 갑작스런 요청을 하게 되어 미안하다며 따뜻한 녹차를 권해 주신다. 미안하실 일도 아니지 싶어서 손사레를 하곤 접수면접지를 읽어 보는데 왠지 묘하게 긴장감이 흘렀다. 급하다는 전화, 당장 오늘 약속을 잡자는 촉박함, 가능하면 이번주에 2번이라도 상담을 하고 싶다는 그 모든 상황이 나를 다소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급했던 마음도 누그러뜨릴 겸 녹차 한잔을 마시면서 천천히 접수기록지를 살펴보았다. 


<진로상담 예전에 받아본 적 있음.  구직과정의 어려움, 우울과 불안>  몇가지 사항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 

내담자의 인적사항에는 39세, 이혼, 어린 자녀 두 명, 대학원 졸업, 무직 이렇게 되어 있다. (모든 인적정보는 *수정변경한 정보임) 그 외의 정보는 전혀 없었고 ‘도움이 되는 상담 희망’이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 


어떤 분일까 어떤 도움이 필요 한걸까? 


잠시 상담실 안을 서성이며 호흡에 집중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 약속된 시간 정각에 승주씨가 상담실로 들어왔다. 이미 10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딱딱하고 건조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권하자 그녀가 앉으며 종이컵에 따른 냉수 한잔을 벌컥 마신다. 그리곤 물 한 잔 더 떠오겠다면서 잠시 나갔다 온다.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지만 쉽게 입을 열긴 어려웠다. 인사를 나누긴 하였지만 그녀는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굳어 있는 표정때문에 쉽사리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도 싸늘했다.. 두번째 잔도 단숨에 비운 승주씨는 물컵을 내려놓고나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비스듬히 쳐다본다. 마치 옆눈으로 흘기듯이 쳐다본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직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냉랭한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승주씨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진로상담에 어떤 기대’가 있는지를 묻자 승주씨는 '큰 기대는 없다'고 하면서 한가지를 먼저 물어봐도 되냐면서 질문을 하였다. 


“ 선생님, 제가 사실 경력단절 되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보니까 마음이 너무 급한데요. 제가 여태까지 3군데 정도에서 진로상담을 받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군데 모두 흥미 검사 해석만 해주던데요…혹시 그렇게 하라는 매뉴얼이 있으신건가요??? 그리고 선생님도 저에게 흥미검사를 하실 건가요? “ 


아!!!…나는 아무런 대비없이 한 대 제대로 얻어 맞은 느낌도 들었다. 우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 이기도 하였지만 비로소 그녀가 왜 나를 그토록 못미더워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러셨군요.  흥미검사를 많이 하셨군요….우선 저도 필요한 상황이라면 검사를 하겠지만 오늘 승주씨를 처음 만난 상황에서는 흥미검사를 실시할 계획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상의를 할 거예요. 그런데  이전 상담에서 검사 해석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셨나보군요” 라고 하자 승주씨는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 제가 가는 곳마다 흥미검사를 하라고 하는데 전 사회예술형 인가? 뭐 그런 거예요. 결과도 기억한다고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건데…그걸 굳이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다시 하고….그리고 상담사들 해석도 다 비슷해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죠. 그래도 뭔가 나중에는 도움되는 이야기를 해주겠지하고 기다렸지만 없었어요.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고 기다리면 이제 다 끝났다고 가보라고 하는데….기가막혀서…… 그런게  진로상담이며 그건 저도 할 수 있겠더라구요. 대체 제가 이 나이게 제 흥미 알아서 뭐합니까?” 


승주씨의 목소리를 격앙되어 있었다. 대단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흥미검사는 진로상담 과정에서 자주 하는 검사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녀에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 듯 싶었다. 그리고 그 검사를 왜 하는지 충분한 배경 설명을 듣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검사를 하고 해석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심리검사 실시는 꼭 필요한 순간에 사용되어야 하고 사전에 내담자와 함께 검사도구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실시할 때 훨씬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아마도 승주씨는 그런 절차 없이 흥미검사를 하고 해석 상담을 받았던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히 ‘흥미검사를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승주씨에게 그런 검사가 얼마나 필요한 과정이었는가가 라는 성찰이 생략되었기에 화가 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긴급한 호소문제는 흥미탐색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면 진로상담에 대한 동기가 낮아 질 수 밖에 없었을테지…이런 저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정말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주제들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상담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실시한 걸까? 그랬다면 적절치 못한 개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상담자들 입장에서 한 두마디 변명을 하고 있었다. . 


“ 승주씨에게 이전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았군요. 진로상담 할 때 흥미검사를 많이 하긴 해요. 특히 장기적인 진로목표를 잡아야 할 때는 나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 일환으로 흥미검사가 간편하고 많이 실시되기도 하지요. 흥미가 진로 상담에서 제일 중요하다거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손쉽게 사용하기가 좋기도 하고 공공서비스기관에서 무료로 할 수 있기도 해서요. 그러나 상담 이슈별로 불필요하다면 굳이 할 이유는 없지요. 그리고 오늘 저랑은 흥미검사를 하진 않을 거예요. 승주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상담시간에 다루려고 하고 있어요.  ’ 라고 하자 그녀는 조금 누그러지는 듯 하였다. 솔직히 이 날 승주씨와의 대화는 나 에게도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가끔 상담사 교육을 하러 특강을 하게 될 때도 슬쩍 언급하던 부분이기도 하다. 



진로상담에서 흥미검사의 기여점을 모르지 않지만 내담자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천편일률적인 검사 실시와 해석 상담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것이 옳다. 특히 최근에 등장하는 젠더를 고려한 진로상담과 같은 영역에서는 상담자의 민감성이 더욱 중요한데 그 이유는 진로상담에서 1950년대까지는 여성을 위한 진로상담은 큰 관심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진로발달 연구 역시 주로 중산층, 백인, 남성을 대상으로 수행되어 왔기에 검사의 실시와 해석에서도 한층 더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흥미검사를 하고 잘 맞는 일을 매칭하는 방식의 상담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소위 말해서 검사 해석 후 직업을 매칭하는 방식으로 상담을 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일이든 구할 수 있다’는 <자기결정>과 <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그 의미가 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대상이라면 이런 방식의 접근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내담자 입장에서는 황당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최근의 진로 연구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아개념을 실행할 수 있는 진로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곳이란 '현실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사회에서나 가능하겠지만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승주씨는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유수의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었지만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었다. 두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일을 포기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지만 결혼 후 10년차 즈음이 되었을 때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되면서 엄청난 인생의 변곡점에 처하게 되었다. 승주씨는 이혼 후 갑작스레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100군데 이상의 회사에 이력서를 지원하였고 단 2군데에서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모두 탈락을 한 상황에서 힘겹게 진로상담을 신청한 것이었다.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흥미검사만 해석해 주고 사회형이니 사람만나는 일이 잘 맞는다는 상담이 얼마나 짜증이 났겠는가? 흥미를 알고 자신의 일에서 흥미를 살리는 것은 진로상담의 과정에서 일의 의미를 추구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그녀가 직면한 많은 장벽과 진로선택의 어려움을 소홀하게 다룬다면 아무리 좋은 검사 결과 해석이라고 할 지라도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것은 흥미검사를 하고 말고의 문제라기 보다는 승주씨가 처한 복잡한 맥락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는가가 선행 검토되어야 한다. 


승주씨 자신도 현실을 직시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원했던 회사들의 이름들을 살펴보니 대개가 과거 10년전 본인이 다녔던 대기업 수준의 회사만을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대학원 학력을 가졌지만 현재 시점에서 어느정도 수준의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경력단절시에 여성의 고학력이 오히려 장벽으로 사용된다는 연구들도 승주씨의 곤란을 설명케 해 주는 대목이었다. 


그녀는 '일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날 곧장 무가지에 나오는 일용직 일자리를 구해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체력도 약하고 가정에서 주부 역할로만  살아온 승주씨가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식당 보조일을 감당키가 어려웠다. 또한 아이들과 생활하기엔 터무니 없이 적은 돈을 받았기 때문에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대학원 학력을 살려 일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학원이나 교육 직종이 떠올랐지만 승주씨는 자신의 아이들조차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아이를 돌보러 다니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녀의 내적인 갈등을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아무 일이나 시작할 수는 없었다. 


승주씨가 희망하는 일은 아이들이 어리다보니 시간제 일을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출퇴근 거리도  40분 이내의 위치 그리고 체력이 좋지 않다보니 업무강도도 높지 않아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과거 자신이 다니던 회사 정도는 아니지만 대학원을 나온 그녀에게 최소한 걸맞는 수준의 회사레벨을 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 선생님은 저 같은 경단녀 상담을 많이 해보셨을거 아니예요? 솔직히 선생님이 제 인생을 어떻게 해 주실 거라고 생각은 안해요. 제가 노력을 해야겠죠. 찾아보고 그래야 되는데 제가 생각하는게 과연 맞는 방향인지 그게 궁금해요. 경단녀 들도 취업 되긴 되나요? 다들 어떻게 준비하죠? ‘ 


대개 질문은 아주 비슷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희망하는 일의 조건도 비슷하다. 시간제 일, 집에서 가까운 곳, 업무가 어렵지 않은 곳, 많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일터.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싶어한다는 점까지 아주 비슷했다. 

과연 그 곳은 어디일까?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였다.


 10년간의 공백기 그리고 이력서부터 셀프 마케팅 그리고 직무 역량, 구직정보 탐색 까지 모두 다 미흡한 상황이었지만 승주씨는 자신의 학력과 과거의 경력에 집착을 하기도 하었다. 그녀의 직업정보로 원하는 일을 찾기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설령 그런 곳이 있다고 해도 과연 그 기업이 승주씨를 원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야만 했다. 


‘제가 가장 바라는 건 파트타임일이예요. 혹시 대기업 같은 곳에서 파트타임도 뽑나요? “ 승주씨의 질문을 들으면서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욕구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혼 후 아이들의 양육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고 지속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현실이었다.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일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당장은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나중에 좀더 나은 일로 연결될 수 있는 일,  그런 일이라면 좋을 듯 싶었다.  


현실로 돌아와서 경제적인 곤란이 어느정도 인지를 묻자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해서 만약 취업이 불가능하면 빚을 내서라도 가게를 해 볼까? 라는 생각해 보았지만 창업은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꼼꼼하지도 않고 사업에 수완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만약 직무훈련을 받아 사무직종 중 회계업무나 접수원 같은 일도 생각해 보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전 진짜 활달 하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전화받고 그런 것보다는 좀 돌아다닐 수 있는 일이 면 좋겠어요. 제가 예전에 고객서비스 분야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다시 그쪽으로 가면 좋구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뒤져봐도 제 나이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는 것 같아요. ‘ 승주씨는 금새 시무록해졌다. 

활기 넘치는 사람인데 대기업 시간제 업무라는 틀을 좀 깬다면 어떨가? 

풀타임 일을 하자면 아이들의돌봄이 해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변에 승주씨를 도와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도 연락이 거의 끊겼고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그녀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빈약했다. 승주씨는 한숨을 푹쉬었다. 


고민을 나눌 상대도 없고 도움을 줄 만한 사람도 없고 뭔가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은 경우에 그 고립감과 두려움은 증폭된다. 승주씨도 그런 답답함이 컸노라 하였다. 진로상담을 받고 싶었던 절실한 이유가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라고 하였다. 진로상담을 하다보면 사별이나 이혼을 하게 되면서 일을 하고자 하는 분들을 굉장히 많이 만나게 된다. 이전에는 진로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서 굉장히 우울하고 불안하고 화가 많이 나기 때문에 몹시 당황한다. 그녀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해 주었고 그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위로만 제공하지는 않는다. 

진로상담 과정에서는 내담자에게 적절한 기대와 적절한 좌절 모두를 제공한다. 

무조건 현실을 제대로 바라 보라거나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높은 포부를 가져라라고 할 수가 없다. 내담자의 상황이 모두 다르고 주어진 능력과 바람이 다르고 활용할 자원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라는 젠더 문제는 일 세계 내에서 여성이 가지는 기회, 고용, 승진, 지위 등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러한 여성의 맥락 정보(젠더)를 진로상담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은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등장하였기에 때문에 승주씨의 진로상담에서는 고려할 사항은 매우 많았다. 


승주씨가 갖고 있는 낮은 자기 효능감, 사회적 지지의 부족,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가라는 질문에 대한 비관적 기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에 대한 편견, 돌봄에 대한 책임, 네트워크의 빈곤 등은 단순히 승주씨 개인의 문제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진로상담 분야에서 좀더 사회정의와 다문화적 시각으로 여성의 진로문제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고 진로결정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영향을 주는 많은 구조적 장벽에 대해서 어떻게 조력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나와 승주씨와의 상담 기간동안에도 몇 차례의 의견 차이도 있었지만 대기업을 고집하는 문제와 학력수준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것에 대한 대화가 자주 거론되었고 그녀가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현실적인 조정을 하였다. 승주씨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생활을 유지하는게 급선무였기에 그 점에서는 많은 자원을 찾아보았다. 동시에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조건들을 제외시켜 나갔다. 그녀와 맞지 않은 일자리는 고려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선 정서적 /사회적 지지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급해 보였다. 

진로란 내면적인 자아개념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기에 물질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을 포괄한다. 한 개인의 경제적 , 사회적 권력은 그 사람의 일과 진로선택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담과정에서는 승주씨에게 현실적 임금의 수준, 그녀가 가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 역할 모델에 대한 노출, 추가적인 직무교육의 기회, 그녀가 접근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지각 등을 조력하면서 지지체계로 여성 일자리 센터나 직업 훈련기관, 평생학습 기관, 돌봄기관, 여성 네트워크 등 필요하다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 


승주씨는 상담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기대를 적절히 조절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잘 조직화해 내면서 열심히 참여하였다. 시작할 때는 급한 마음이었지만 몇 번의 상담 이후에는 상당히 차분하게 준비해 나갔다. 하지만 상담을 하면서도 늘 마음 한 구석에 ‘나쁜 엄마’ 라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일을 하느라 애들도 잘 못 챙기는데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일해야 한다는 패배감을  많은 느꼈다. 

본인이 하는 일이 자기 계발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양질의 일도 아니고 동기 부여를 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닌데 '뭔가 해보겠다고 전전긍긍한다'는 자기비하의 말도 자주 하였다. 죽지 못해 하는 일 같고, 애들 굶길 수 없으니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승주씨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했고 화가 났다. 


상담 시간에 승주씨에게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원했던 상황도 아니고 꿈꿔왔던 일도 아닌 걸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승주씨는 결국 불행해야 할까? 


좋아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도 일을 통해서 의미를 구성해 나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진로상담자가 할 일이라 생각했다. 한때는 실력도 있고 능력도 있었던 승주씨 였지만 지금 처한 환경에서는 그 실력을 바라보는 평가의 기준도 바뀌었고 능력도 바뀌었다. 그러나 승주씨가 그동안 경험해 온 삶의 이야기 속에서 쌓아온 경험들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강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국면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지를 제공하는 것은 진로선택에 놓인 많은 장벽을 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절한 목표를 구직 목표를 잡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넓혀가는 것 역시 도울 수 있는 영역이었다.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승주씨에게 나는 Schulthesis라는 진로연구자의 말을 빌어 위로를 하였다. 

‘어머니가 될 건인지, 아니면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인지 라는 선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어요.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의미 있는 일이었고 진정한 일이었어요. ‘ 

무가치한 일을 하느라 10년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야 일을 하겠다고 뛰어 다니고 있다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보던 그녀의 말이 옳지 않은 표현이라 느껴 졌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개입의 순간이야말로 진로상담이 진로교육과 다른 지점이라 생각한다. 

진로상담과정에서 제공되여야 하는 것이 있다면 승주씨가 하는 일에서 잘해 내는 분야를 발견할 수 있고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고 그들로 부터 지원을 받을 수도 있으며 상사로부터 자율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와 희망을 갖도록 돕는것도 포함한다. 

일을 통해 우리가 자율성과 연대감, 숙련도를 얻을 수 있다면 개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커뮤니티에 접촉할수록 많은 기회가 열리기도 한다. 승주씨에겐 더 큰 커뮤니티와의 연결이 가능하도록 많은 브리지도 필요하다. 


많은 분들이 그래서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는가가 궁금할 것다. 


상담으로 승주씨가 직장을 구했는지 딱 맞는 조건의 회사를 찾았는지에 관해서 알고 싶겠지만 고백하건데 10번의 상담기간으로 인해 그녀에게 딱 맞는 직장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결 편안해 졌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남겨두었다. 취업을 했다면 기뻤겠지만 그녀의 목표지점이 다소 구체화된 것으로 만족했다. 그녀는 한 평생학습 기관의 매니저 자리를 목표로 하겠다는 야무진 포부가 생겼다. 학습 매니저라면 도전해 볼 용기와 기대를 품게 되었노라고 하였다.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녀의 시작점이 왠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녀를 처음 만날 날 나에게 던져졌던 질문 “ 선생님도 저에게 흥미검사 하실 건가요?”  라는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복기를 해 본다. 


그녀에게 흥미검사가 불필요 했는가? 그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긴 하였다. 하지만 승주씨의 진로장벽과 맥락, 그리고 기회구조에 대한 접근 가능성과 한계, 특히 흥미검사를 적용할 때 일과 관련된 선택권과 자유의지는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는 의식 등 좀더 젠더 중심의 시각으로 경력 단절 여성의 진로상담의 과정과 방향을 치밀하게 돌아보는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었다. 


다양한 내담자가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진로상담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맥락과 의미화에 초점을 두는 진로구성 상담은 승주씨와 같은 경력 단절 상황에 놓인 여성이 미래에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한 자기 모습들과 인생에 관련된 의도와 기대들을 정교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 어떤 일에서 조차 그 자체를 외면하지 않고 의미를 찾아나가도록 조력하는다는 점에서 진로구성의 사회구성적 시각은 매우 유용한 관점이라고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의미있는 일과 프로티언 커리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