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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일을 해야죠

자기만의 진로를 만들어 가

피터 비에리는 ‘자기결정’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감정과 소망의 방향은 타인과 그들의 행동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진 생소한 삶 속으로 우리 자신을 집어넣기도 한다고 썼다. 왜 대학을 가는지, 왜 직장을 그만두는지 같은 일들에 대해서도 타인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그러나 타인은 어디가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였다. 

나는 피터 비에리의 이 문장들을 작은 노트에 적어두고 자주 펼쳐보았다. 진로란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내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과 유사한 말이기에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가 느끼고 바라는 것들이 정당한지 우리 자신에게 조차 혼란스럽고 불투명하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진로문제에 있어서 타인으로부터 받는 영향력 가운데 우리의 자기 결정을 방해하는 것과 도움이 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란 질문으로 변용되어 내 머릿속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수진씨의 진로는 다채로웠다. 청소년시절 중국과 북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한국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국내외 두루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하였다. 

대학을 다닐 때는 영자 신문 학생 기자단과 대학생 마케터로써 대외활동을 하였고 뮤지컬 동아리에서 기획과 사업기획 등을 업무를 맡아 작은 공연을 성공시켰던 경험도 있었다. 

호기심이 많고 배움에 대한 갈망도 큰 편이여서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학부 전공은 경제학이었다. 그녀가 상담실로 찾아온 이유는 ‘회계사’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부가 되지 않고 진로고민으로 항상 머리가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수진씨의 부모님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전문직 시험을 보길 바랬지만 딸이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고 하니 젊을 때 후회없이 해 보라는 의미에서 크게 관여를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회계사 시험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였지만 우연한 기회에 공연 예술계의 한 극단에서 장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그녀의 진로는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서 하게 된 일은 아니었지만 아르바이트는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다. 

워낙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기에 극단의 마케팅과 홍보 일은 성격에도 잘 맞았다. 정식으로 마케팅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영자 신문기자와 동아리 활동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인턴으로 시작해서 장기 아르바이트가 되다보니 배우들과도 친해졌고 손발도 척척 맞아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한 켠에 숙제처럼 남아있는 ‘회계사’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곧 시작해야지‘ 라고 자주 생각했지만 연극단체에서 일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극단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거기에서 만나는 공연 예술계 친구들이 너무 좋았다. 수진씨 주변의 사람들은 솔직했고 의리가 있었으며 유머러스했다. 해외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느껴왔던 외로움을 그곳에서는 느끼지 않았다. 모두가 도와주었고 정이 넘쳐 흘렀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굉장한 즐거움이었고 무엇보다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수진씨의 성향에 공연 예술 분야는 잘 맞았다. 

마케팅과 홍보분야는 잘 알지 못했지만 많은 공연을 보고 자란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인턴과 아르바이트 일 뿐 이었지만 열정적으로 일하며 보람을 느꼈다. 작은 연극을 새롭게 기획하고 시도하는 일은 즐거웠고 어린이 뮤지컬을 홍보하는 일은 더욱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사람 좋아하는 성격인데다가 협력하는 일도 좋아하니 공연 예술 분야는 잘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때로 몸이 고단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성취감에 비하면 그 정도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 수진씨의 표현을 빌자면 ‘살아있는 느낌’ 그 자체였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되자 부모님도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본연의 일로 돌아와 시험 준비를 하길 바라셨다. 

아무리 재밌고 좋아하는 분야라고 해도 부모님이 보시기엔 제대로 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한 생각은 수진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언제나 지금 여기서 하는 일은 ‘그냥 아르바이트야’ 라고 생각했고 어느정도 지나면 ‘제대로 된 일’을 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부모님께서도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시고 스스로도 더는 미룰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계사’라는 구체적인 목표는 대학을 입학하고 경제학을 선택할 때부터 정해진 길이었다. 아버지도 회계사였고 여동생도 회계사 시험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수진씨도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해 오던 일을 그만두고 시험공부를 시작하려니 공부가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 길이 맞아 그러니 빨리 시작해야지’ 라는 생각했지만 공부에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무슨일인지 시험 공부만 생각 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상담실에서 만난 그녀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고 침울했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듯 보였다. 진로문제에 확신감을 갖기 어렵고 혼란스럽다고 하였다.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높아져 있었다. 그녀의 불안함이 내게도 전해졌다.  

어떻게 연극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가를 물으니 대외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가 연극을 전공했고 그 친구 소개로 간단한 소품 담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 점차 커져 2년간의 장기 인턴 까지 가게 되었노라고 하였다. 좋아하는 일을 실컷 했다는 점에서는 만족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제라도 제대로 된 일을 찾아야 될 것’ 같고 전공도 살리고 싶어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였다. 

연거푸 제대로 된 일을 해야 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녀의 초조함이 전해졌다. 

그녀가 말하는 제대로 된 일, 도대체 그 일은 어떤 일일까?       


‘제대로 된 일’이라는 말은 직업의 어떤 면을 말하는 걸까? 금전적인 것일까? 사회적 지위 같은 걸까?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규칙적인 일과를 뜻하는 걸까? ‘명예나 명성과 같은 것인가’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는가?’ 

수진씨가 말하는 ‘제대로 된 일’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말하는 내내 그녀가 짓고 있는 찡그린 표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계사 준비를 해야겠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자신감이 결여된 듯 느꼈졌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좀 전의 생기발랄 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꽤 긴 시간 인턴일을 하셨으니 공연 예술 쪽에서 계속 일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셨을 듯 한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즐겁게 일했다고 하였는데 무엇이 그토록 즐거웠고 왜 그 일은 ‘제대로 된 일이 아니’란 느낌을 받은 것인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 그 배경이 궁금하였다. 

“전 공연 예술계에서 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정말 좋았고 마케팅과 홍보일도 정말 재밌었어요. 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언젠가는 꼭 다시 연극계로 가서 일을 하긴 할건데요.... 하지만 아무래도 공연 쪽은 급여도 작고 워라밸도 별로고 미래도 불투명하고 그러니까요. 전 무조건 제 개인 생활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는 전문직이 좋잖아요. 누구 간섭도 안 받고 급여나 그런 부분도 어느 정도 충분할테고요. 제가 원하는 것을 하려면 우선 돈이 있어야 할거 같아서요. 전 나중에 꼭 연극 분야에서 다시 일하긴 할 꺼지만 지금은 직업적인 안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수진씨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급여나 복지 같은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진씨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약간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수진씨는 ‘일’과 ‘직업’과 ‘인생’을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었고 직업에서 기대하는 재정적 보상으로서 생계유지, 복지나 규칙적인 생활이라는 측면을 확보한 뒤에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직업)을 하겠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야만 하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소명)에 대한 기대가 양분되어 있었다. 

두 가지 갈림길에서 공연 예술일을 하면 돈도 못 벌고 워라벨도 나쁘고 직무 안정성도 떨어진다고 말은 하면서도 너무 재밌고 정말 좋아한다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한편 전문자격증을 가지면 주변에서도 인정해 주고 안정성도 확보할 수 있고 어느정도 사회적 위치도 갖추게 되니 우선은 그 길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갈등이 많이 되겠군요’라고 하자 수진 씨는 나를 쳐다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정답은 이미 나왔는데 공부가 잘 안되고 가슴이 좀 답답해서요. ’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주도적인 경험과 비교하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수진씨가 그런 압박을 느끼는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죠’라고 간단히 언급하곤 수진씨가 내게 했던 말을 요약해서 다시 들려주었다. 

‘우리가 오늘 상담시간에 두 가지 큰 가치 앞에 놓여있네요’. 라고 하자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씨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통 일이라고 할 때 협의의 의미의 일(work)은 돈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반면 광의의 의미에서 일(work)은 인간이 폭넓게 성취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일이 일차적으로 생계유지의 수단일지라도, 넓은 범주를 포괄하는 다차원인 개념으로 보는 관점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일테면 공동체, 사회, 경제에 의미 있는 생산 활동을 함으로써 외부 세계에 자신의 정체성을 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어떤 이에게 일은 그냥 ‘먹고 살려고, 월급받으려고 하는 일’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에게 일은 ‘자신이 누군인가’를 정의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행위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일이 타인 및 더 넓은 커뮤니티와의 연결하는 ‘의미 구성의 기초’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일을 어떤 차원으로 바라보는 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과연 수진씨에게 일은 어떤 것일까?

그녀에게 일이 갖는 의미가 궁금하였다. 그녀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일(work)이라는 단어를 생각할때 우리가 직업으로 갖는 하나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활동과 관련된 생각과 가치들의 집합이라고 간주하는 편이다 

그녀가 사용한 언어에서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제대로 된 일’ 에서 함축한 그녀만의 일은 무엇일까? 불분명한 생각은 불분명한 언어로 드러나고 그 언어는 결국 우리의 세계를 구축하는 재료가 될 수 있기에 그 언어를 명확히 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Arendt(1958)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신체적 활동은 일(work)과 노동(labor)으로 구분하였는데 노동은 불가피하게 해야만 하는 신체의 고통스러운 노력을 암시하지만, 일(work)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에서 인간의 물리적 환경의 수정을 통해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지속성을 갖는 대상(object)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 하였다. 

반면 일을 천직(calling)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일의 목적과 삶의 의미의 합치를 추구한다. 즉,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자기 성취를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일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일은 그냥 ‘일일 뿐’이라기 보다는 일은 개인적 의미에서 정체감, 자기 존중감, 그리고 자기실현의 중요한 토대로 간주된다. 따라서 일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의 목적의식을 가진다면 충족감을 확보하겠지만 역으로 일에 대한 목적의식을 상실하게 되면 좌절감, 지루함, 무의미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자기 일치적 목표’일 때 인간은 행복하다. 결국 일이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의 의미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존재 이유와 연결된 복잡한 실천적 개념을 포함하기에 매우 복잡한 대상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영향을 미치게된다. 


수진씨가 회계사를 선택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다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면 하등 문제 될 것은 없다. 처음엔 왠지 어색한 옷을 입은 느낌이 들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자신의 삶 속으로 일을 통합해 간다면 좋은 방향이다. 

연극 분야에서 계속 일을 한다 하더라도 재미를 넘어 의미의 차원을 만나지 못하면 그 또한 절반의 성공이리라. 옳은 답이 있다기 보다 수진씨가 자신의 삶을 멀리서 보는 연습이 필요해 보였다. 

수진씨가 진로문제에서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성격적 요인이었다. 진로상담 영역에서 많은 케이스 스터디를 해 보면 ‘의존적’인 유형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진로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잘 드러내지 못한다. 타인이 기대하는 바에 순응하거나 남들이 하는 일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한다. 대세를 거스르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원하는 일이 있어도 선택할 수 없다. 스스로 느끼는 불안을 감당할 만큼 내적 확신이 없고 이후에 일어날 안좋은 일들을 책임지기 싫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강력하게 추천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선택하는게 안전하다고 느낀다. 자신의 의견을 접어버리고 남들이 옳다는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무척 우려스럽고 특정한 진로목표를 세워 노력을 한다고 해도 자기 주도적으로 진로결정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내적인 의미추구’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적인 의미가 없으니 무엇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안에서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더러 만나는 내담자들 중에 ‘내가 고작 이 월급 받으려고 여기서 이런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 중 이에 해당되는 분들이 있다. 만족감을 얻게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최악을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만 살아온 경우라면 삶에서 만족을 느끼기란 매우 어려울 테니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다. 


회계사 시험에 몰입이 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는 수진씨는 자신의 흥미가 예술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저주하다시피 하였다. 예술적 흥미를 당장 개조해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거기서 만족을 느꼈다면 좋겠다는 말도 하였다. 자기 부정이었다. 

경제학과에 진학 할 당시 가졌던 꿈은 명확히 회계사였다. 아버지도 같은 직업을 가졌기에 수진씨는 별 다른 고민없이 경제학과에 진학하였고 당연히 회계사를 목표 하였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제공하는 안정된 경제적 지원은 분명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경제학과를 다닐 때만 해도 회계사가 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는데 대학시절 우연히 시작한 연극계 홍보 마케팅 일을 통해 생각이 많아지고 갈등만 깊어졌다. 

가야만 하는 길이 분명히 앞에 있는데 왜 마음은 말을 듣지 않는건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 수진씨는 회계사 공부를 하는게 맞는 길이라고 이미 스스로도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돈도 못벌고 미래가 불투명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반복 하였다. 

상담은 계속 초기 상태를 맴도는 느낌이었다. 하루는 그냥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해야지요 하다가 다음날엔 그렇지만....하면서 자신의 흥미와 끌림을 애닳아하였다. 

많은 시간을 이야기해봐도 상담 내용은 거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재밌고 관심있고 흥미로운 것은 공연예술분야의 마케팅 업무이지만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이루고 난 뒤의 성취를 기대해 보면 단연코 압승은 회계사였다. 


의사결정의 시간은 압박으로 다가오고 스물 아홉이라는 나이도 수진씨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상담이 진행되고 얼마쯤 지나서 수진씨는 나에게 일방적인 상담 종료를 선언하였다. 상담은 더 이상 필요치 않고 처음 마음 먹은대로 회계사 시험을 보는게 좋겠다며 더는 갈등 하지 않기로 했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나는 무척 아쉬웠고 몇차례 설득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의지는 확고 부동했고 공부할 시간을 쪼개서 상담 시간을 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자 더는 붙잡지 못했다. 상담이 중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종결이 되고 말아서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달리 뽀족한 방법도 없었다. 아무런 작업도 하지 못하고 상담이 끝나버린 것 같아 실망감이 앞섰다. 

그런데 어느 날 수진씨가 불쑥 연락을 해 왔다. 공연 예술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는 주로 어떤 곳이 있느냐는 질문의 메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수진씨는 멋쩍은 표정으로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제가 어떤 지역기관주관하는 문화예술 기획자 교육 공고를 보았는데요…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나는 수진씨의 질문을 듣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마음을 정했다면서 단호하게 돌아가던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남아있는데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작은 공고문 하나를 펼쳐 놓으면서 눈을 반짝이고 앉아 있는 그녀가 천진하게 느껴지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는 그 공고문을 같이 살펴보았다. 그리곤 수진씨에게 물었다. 이 공고문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어떤 생각이 스쳤는지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였다. 

그녀는 ‘이 과정이 너무 끌린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뭔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당장 교육신청의 마감 날짜가 촉박한데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지 만약 작성한다면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이것 저것 해야 할 일들을 늘여놓으며 조바심을 냈다. 

정말 이 원서를 쓰고 싶어요? 라고 묻자 그녀는 ‘마감일이 당장 내일이면 오늘 밤을 새워서 쓰면 되지않을까요?’ 라고 하면서 노트북을 펼친다. 더는 망설일 필요 없고 우선 입사지원서를 써보기로 했다. 그날 우리는 자기소개서를 고치느라 두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선생님 경력이 있는 사람은 가산점도 있어요.’ 그녀의 공고문을 상세히 살펴보다가 큰 소리로 떠든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열정과 힘을 느꼈다. 그녀는 굉장히 수다스러워져서 이 얘기 저 얘기를 꺼내놓는다. 그러면서 막상 회계사가 된다고 해도 본인 적정에 맞지 않으면 자신은 언제든 다시 돌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발랄함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더욱 목소리가 높아지고 뭔가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무게를 잡고 질문을 하였다. 

상담자가 의사결정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르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만약 공연 예술계에 몸담은 후에 보수도 적고 복지도 좋지 않고 미래의 안정성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물으니 그러면 회사를 좀더 나은 쪽으로 옮기거나 해외로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였다. 회계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수진씨의 신념을 바꾸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속에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충동적인 의사결정이지 않을까 싶어 좀 더 신중하게 두가지 대안을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회계사를 하지 않는 것과 공연 예술 분야에서 일하지 않는 것 중에 어떤 것을 더 후회할 것 같아요? 그러자 그녀는 이제야 비로서 뭔가 분명히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나도 그녀의 생각을 알 것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그녀의 언어로 듣고 싶어 대답을 기다렸다. 

‘이 과정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요’/      


사실상 우리의 진로선택은 직업의 안정성과 흥미 양자 모두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통합해 내는가는 각자에게 달려있고 그렇기에 진로의 과정을 ‘삶의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진씨는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확고했다. 어떤 일이 좋은 일이라는 기준이 명확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점을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서서히 다른 분야에도 눈을 돌려 탐색을 시작한 것 같아 반가웠다. 우리는 시간이 촉박하여 서둘러 그 과정을 이수하고 진출할 수 있는 진출처도 함께 찾아보았다. 수차례 의사결정이 뒤집어 지고 물러나고 되돌아오곤 하였지만 수진씨의 에너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국내외 분야를 모두 찾아보았고 그녀의 능숙한 외국어 실력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영역이 있는지도 함께 찾아보았다. 몰입할 수 있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 자기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에너지도 넘치고 주도적인 태도가 된다. 그녀도 신바람이 나는 듯했다. 

‘선생님 그동안 저는 무엇을 무엇을 걱정해 왔던 걸까요? 돈이 없을 까봐 걱정하는건지, 명예를 얻지 못할 까봐 걱정하는건지 생계를 걱정하는건지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제가 회계사 되길 바라시는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릴까봐 걱정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공부도 시켜 주시고 키워주셨는데 제가 회계사 되면 진짜 좋아하실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실망시켜 드리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자꾸 이쪽이 끌려요. 일은 힘들겠지만 재밌을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 드리는게 마음에 걸리지만....저는 정말 이런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거든요. 제가 잘 해서 만족하고 행복해 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지 않을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그녀와 아버지 사이의 깊은 사랑이 전해졌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이 하려는 일을 넉넉히 기다려 줄 만큼 좋은 분들이었다. 부모님게 실망을 주느니 원하지 않더라도 일단 시작해서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하는게 아닐까...그녀가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진심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망과 욕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가 회계사 공부를 하는 것이 더 나은 결론이었을지도 모르고 공연 예술 기획자 양성과정을 듣는 것이 바보 같은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진씨에게 공연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외면하는 것도 옳은 방향은 아닌 듯했다. 

회계사를 하겠다고 상담을 그만둘 때에도 그녀의 결정을 지지했고 공연기획자 과정을 듣겠다고 했을때도 나는 그녀를 지지했다. 다만 좀 더 깊이 있게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 원했다. 


1950년대와 60대를 기준으로 발전해 온 인본주의 상담자 로저스나 매슬로 같은 학자들은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는 고차원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자기실현의 동기’라고 하였다. 

그녀가 회계사가 되면 부러움도 사고 주변의 사람들도 기뻐하실 테지만 진심으로 끌리지 않는 길이라면 그것은 수진씨의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하면 더 좋은 선택일까? 라는 질문보다는 자신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찾을 때 비로서 자기 실현의 길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수진씨가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사실에 나도 마음이 설레였다. 그녀의 밝아진 표정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다행히 수진씨는 어떤 선택을 해도 더 나은 진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주도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기결정이론(self – determination theory)에서는 내재적 동기란 ‘자연적인 생체적 활동을 촉진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다. 내재적으로 동기부여된 행동은 ‘선택의 개념, 강요나 강제 없이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며 경험된다. 내재적 동기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힘의 근원으로 과제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나 흥미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며, 이러한 수행의 유지와 증대가 창의성, 자존감, 개인의 안녕감을 향상시키게 된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해왔던 것을 제대로 직면하게 된 것 같아 후련하였다. 

그녀의 미래의 모습은 어떻게 펼쳐질까 기분좋은 예감이 들었다. 맘껏 상상해보니 내 마음도 들뜨고 행복해졌다. 희망과 기대로 설레는 것. 나는 진로의 출발선에 이보다 더 좋은 자원은 없다고 믿는다. 때론 후회하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는 것과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허미니아 이바라 (Henminia lbarra) 는 일탈과 변형이 미래 경력의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 이라고 예측하였는데 ‘발자취가 적은 길’이라는 토론주제로 좌담회를 열기도 하였다. 

확실하고 안정된 미래를 가능하게 도와주는 직업 선택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다. 앞으로의 미래 사회는 더더욱 그럴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이 지속적인 노력을 투입할 수 있는 흥미로운 분야를 찾고 몰두해야 한다. 일은 곧 우리가 누구인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부분의 신경을 자신에게 쓰면서 산다. 그 어떤 사람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내면의 나침반에 집중한다면 그 나침반이 분명히 옳은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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