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샛별 Aug 12. 2022

 어느 날의 메모장

그 시간들을 사랑하는 이유




메모장에 글을 쓴다.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다가 , 차를 마시다가.

일상의 한편에서 안개처럼 떠돌다 어느 순간 선명해지는 생각들을 쓴다.

어느 날 그 문장들을 다시 읽다 각기 다른 날의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엮여 있음을 다.





- 4. 2022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 ) 중 모리아의 동굴에서

포르도: 반지가 내게 오지 않았다면...

마법사: 살다 보면 우리가 원치 않았던 일을 겪기도 한단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주한 운명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뿐이지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다가왔던  많은 일들. 나는 바른 결정을 했을까?


-5.21.2022

장항아리를 손질하다가 첫 뻐꾸기 울음을 듣다. 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20대.. 30대.. 40대.. 50대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일하던 손을 내려놓고 멍하니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


- 5. 2022

불후의 명곡 자우림 편 윤하의 노래를 들었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 읊조리는 듯한 독백이 첫머리를 장식한다. 그 독백이 마음속으로 스미어 들어온다. 너도 나도 모두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떠난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해.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날의 바다는 퍽 다정했었지.

아직도 나의 손에 잡힐 듯 그런 듯해.

부서지는 햇살 속에 너와 내가 있어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꿈을 꾸었지.

그날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오네.

영원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너와 나.

너의 목소리도 너의 눈동자도

애틋하던 너의 체온마저도

기억해 내면 할수록 멀어져 가는데

흩어지는 널 붙잡을 수 없어.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해.

그때는 아직 네가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영원할 줄 알았던

그때의 노래가 들려오네

스물다섯 스물하나.


가사 하나하나가 얇은 살얼음 같이 희미한 그때의 기억에 작은 균열들을 낸다. 이 노래를 준비하고 부르는 동안 노래가 과거를 아름답게 느끼게 했고 현재를 응원해 주는 듯했었다는데.,. 그녀의 느낌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아련하지만 젊은 날의 기억들이 토막토막 기억 속에서 살아난다. 여기저기서 관객들이 울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눈물을 훔친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나도 같이 눈물 훔치고 만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첫 뻐꾸기의 울음에 울컥 귀 기울이던 그 시간이 다시 떠오른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마치 그 노래처럼 첫 뻐꾸기의 울음이 내 오랜 기억을 불러왔던 거였구나.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은 참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다.

시인이 시를 쓰게 된 것은 꿈에서까지 그리던 내 나라와 내 집, 그 귀국을 포기해야 하는 힘든 심정을 그린 것이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열세 평의 작은 집이었지만 가족 모두가 행복했던 그 집은 '착한 당신'이 되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었노라고. 그 집은 긴 세월 고향이며 애인이었노라고('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중에서).


어느 날 사랑하는 남편을 폐암으로 잃은 여인이 시인께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긴 투병 중 어느 날 남편이 언제 시간 날 때 읽어 보라고 준 종이쪽지를 장례가 지난 다음에 발견하고서.

당신의 시가 죽은 내 남편을 내 옆에 다시 데려다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그리울 때면 늘 이 시를 읽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다가도 내 남편은 내 옆에 다시 와줍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이 시를 내게 읽어 줍니다. 이 시가 나를 아직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마종기 시작 에세이 중에서

시 한 편이 깊은 슬픔 속에 있는 한 사람의 외로움을 위로해 준 것이다. 살게 하는 힘을 준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바람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다. 착한 당신은 슬픔 속에 남겨진 그녀다. 시가  남편의 영혼이 되어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말''바람''착한 당신'이 읽는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오듯이 시나 노래는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더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것으로서의 새 생명을 갖게 되는 듯하다.

윤하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 훔친 관객들 모두  나이와는 무관하게, 젊으면 젊은 대로 나이 든 이는 또한 그대로, 그 나름의 시간 속 추억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노래가, 그 노랫말이, 가수의 표정과 마음이 담긴 메시지가 곧 자신의 이야기로 느껴졌을 것이리라.

그들 모두에게 그 시절은 가장 순수하고 겁 없으며 서툴고 어리석었던 시절이었을지도,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고 우리를 울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뻐꾸기 소리를 기억하고 윤하의 노래를 눈물 속에 들으며 나는 젊은 날의 나를 위로한다.

다시 돌아가 그때와 똑같이 어리석게 살지라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그때는 잘 몰랐지만 원치 않는 운명이 내 앞에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느 길로 갈지 선택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을 때 너는 그 길에서 최선을 다했노라고.


이제는 하나 둘 사랑하던 이들이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갔고,  몸이 아파 고생하는 이들을 위로해야 하는 시간들은 잦아지지만 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고 내 사랑을 전해야 함을 가슴에 새긴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윤하의 노래 독백 부분, 몇 장 남지 않은 달력 같은 나이를 향해 가며 나의 화양연화, 비록 그 시절로부터 아주 멀리 왔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나를 사랑한다.

'그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아쉬움이 아닌 그 시간을 사랑함'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향한 힘을 얻는다.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Main photo : by EI Swaggy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만남 그 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