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친지나 인연이 있는 곳을 여행하듯이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익숙한 곳을 오고 갈 뿐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게 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볼일이 있을 때만 바삐 이곳저곳을 들러서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만 할 곳을 바쁘게 다녀오게되곤 했다.
많은 이들이 가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곳, 춘천이 내게 그런 곳이었다.
한번 꼭 해보고 싶었던 북스테이 초대를 받았다. 일 년여 엄마의 병구완에 지친 이가 자신에게 부여한 하루의 휴식 여행길에,작지만 그간 도와준 일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또한 익숙지 않은 혼자 여행의 동반자로 하루 쉼의 시간에 나를 초대해준 것이다.
나 역시 봄이 되어 시작된시골농사일을 거든지십일만에 몸에 무리가 와서 집으로 쉬러 가는 참이라동행하기로 했다.가는 날이 집으로돌아온 바로다음날이었기에 각자의 집에서 떠나 자신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늦게 만나서 실레마을 근처에 있다는 북스테이로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날 나의 스케줄은 조금 일찍 김유정역에 도착해서 구옥을 개조해서 꾸민 실레책방 만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최근 '싶은' 리스트 중 하나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독립책방을 다녀보는 것이다.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녀 본 횟수가 많지 않다 보니그저 내 나름의 눈길로 그 독립서점만의 특색이나 진열해 놓은 책의 종류, 진열방법, 서점 주인이 적어 놓은 글들, 그림엽서나 아기자기한 꾸밈 등속을 보게 된다.인터넷이아니라 실물로책들을 만나고 책에 진심인 책방지기들이마음을 들여 정성스럽게 골라 꾸민 새로운 느낌의책방을 둘러보는 일은늘 호기심과 설렘이 있다. 더구나 새로운 여행지에서 말이다. 대형서점에서무수히 많은 종류의 책들 가운데서 좋아할 만한 책을 찾는 것도 좋지만,같은 관심사를 가진 책들을책방지기의 공간에서다시만나는 것, 또는내가 몰랐던좋아하는 유형의 새로운 책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즐거움이다.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본아기자기한 작은 마을 책방의 실제모습은 어떨까. 월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며 차는 팔지 않는다니 미리책방이 멀찍이 바라다 보이는 카페에서 고즈넉한 마을을 바라다보며 커피 한잔을 마시고두 시간여를 보낼 준비를 했다.역사 근처와는 달리 언덕 위쪽은 사람의 발길이 적고 밭이며 오래된 나무들이며드문드문 집들이 펼쳐져 있는 한가하고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풍경이다. 금세 어디선가 불쑥 점순이를 닮은 처녀를만날 수 있을 것만같은금병의숙길너머 나지막한 금병산의 풍경,카페의 통창을 통해 그산을 마주하며 홀로 마시는 차맛이 참으로 달다.
갑자기 아주머니 몇 분이 오시더니 카페안이 시끌시끌해져서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천천히 걷다가 갈림길에 있는 실레이야기길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보며 다음번에 무릎의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저 길도 한번 걸어 봐야겠다생각한다.
책방의 모습은 파란기와, 큼지막하게 책이라쓰인 휘장, 마치 시골 할머니댁 같은 외관이 정답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은 닫혀있고 창문에 표시된 휴일에 월요일이 더해져 있다.내가 만든 '싶은' 리스트를 또 한 번 실현하는 꿈을 안고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더니... 기뻐하며온 길인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창문 너머로 책방 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풍금이 있는 아기자기한 내부의 모습을눈에 담고 다음을기약하고발길을 돌렸다.그날의 나의 주된 계획, 두 시간여를 할애했던 일이 붕 뜬 셈이다. 하필 월요일이라 박물관도 김유정 생가도 기차를 활용해 만든 역사관도 모두 쉬는 날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다리가 불편하지 않다면 이름도 재미난실레마을길(산골나그넷길,콩밭길, 신바람길, 수작길. 동백숲길 등)을 걷고도 싶지만 아픈 다리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만나기로 한 시간에 그곳에 간다는 마을버스를 탈 수는 있을지.. 자신이 없어 그냥 실레마을 구경길에 나섰다. 꼭 가야 할 곳도 없으니 휘적휘적 기웃기웃 아무 생각 없이 마을길을 거닐었다.
자주 들르는 고장이지만 다녀보지 않은 곳을 아무런 목적 없이이렇게 기웃대는일이 의외로 재미있음을 느낀다.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여기는 무엇이 있군, 꽃나무도 보고, 비료가 드문드문 놓인 밭도 보고, 영화잡지가 있는 헌책방 산골서점을 들러 책도 사고 그림이 있는 카페에서 그림구경도 하고 문 닫은 구역사 건물 앞에한참 앉아도 보았다. 한 바퀴를 돌며 차 한잔, 또 한 바퀴를 달리 돌며 또 한잔, 두 잔이나 차를 더 마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행지에서도 많은 곳을 보기보다는 스미듯 천천히 둘러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슬며시 웃게 된다.
북스테이의 공용공간에서 바라본 풍경
단지 승객이 세 사람뿐인마을버스를 타고 팔미천을 끼고 있는 금병산 자락에 위치한 북스테이에 도착했다. 정말 조용하고 호젓한 곳이다. 산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북스테이 건물은 몇 개의 동이 따로따로 별채처럼독립적으로 나누어져 있고외부와는 큰 문으로 차단되어 있다. 함께 사용할 공용공간의 문을 열면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책들이 꽂힌 긴 선반,큰 탁자, 강을 끼고 있는 길을 내려다보며 산과 마주하여 놓여있는 안락한 의자, 별을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 조용히 드나드는 사람들 간의 말없는 눈인사, 개냥이들 뿐이다. 외진 곳이라 나가기도,나가야 할 이유도 없는 그야말로 자발적 고립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저 좋아하는 책 몇 권을 챙겨 와서 창밖 풍경을 내어다 보며 읽거나 방앞 작은 탁자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거나 공용 뜨락에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일이면 그만이다.
자발적 고립이 주는 이 평온함. 자잘한 일상의 일들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넓은 창을 통해 자연만을 접하는 이 시간이 좋다. 내 집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이 시간이삼사일쯤더 주어진다면 좋으련만...
창밖 작은 툇마루 앞 나뭇가지에 많은 종류의 새들이 다녀간다. 창문이 닫혀 있으니 새들은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고 저희들끼리 마음 놓고 놀다가 간다. 그래서였구나.새에 관한 책이 여러 권있음은. 공용 공간에서 새에 관한 책을 찾아들고 와서새관찰을 한다.어치, 곤줄박이, 박새, 동고비.. 이어지는... 새들의 노랫소리.
어둠이 내리고 병구완을 하느라 푹 잠 한번 못 잤던 이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많이 힘들었구나.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이 많다.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도 나의 시간에 쉼표를 찍는다.
창문으로 보는새들
삶도 또한여행길이다. 해야만 하는 의무와 이루고 싶은 욕망과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긴 시간을 달려온내 삶의 여행길은어느새 가을 풍경으로 물들었다. '늙은이의 머리 위에 내린 흰 눈은 봄바람이 불어와도 녹지 않는다'는 옛이야기에 걸맞게 내 머리 위에 내린 소복한 흰머리는 염색으로 감추었을 뿐이다.그렇게사는 동안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우선순위에 다른 이들을 먼저 두며 살 때, 잘 살고 있다고 안도하며살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런 의무감 때문에 스스로를 옥죄어 많이지치기도 했었다.슬그머니 좁혀져 오는 노년의 검은 그림자는 윗세대를 넘어 어느덧 우리들의 세대에 가까이 와 있다. 아직은 자유롭게 내 발로 움직일 수 있고 작은 꿈을 꿀 수 있는 내게 남은 밝은 빛의 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다.내 이 시간들을 사랑하리라.
지금 나와 함께 한,암환자의 간병인으로 사는 결혼하지 않은 누군가의딸, 그녀의 지친 얼굴이 안쓰럽다. 이미 한 분을 암으로 떠나보내고 다시 병든 엄마를 돌보아야 하는시간,아주 잠시라도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아니 스스로도 자신을 도와주어야만 한다.자신만큼그녀의 엄마를 헌신적으로 챙기지는 못하더라도손 내밀어 다른 가족들에게 아주잠시라도과감하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요청해야만 한다고.아주많이 지쳐서야이제 그는겨우 첫걸음을 내어 쉼의 하룻밤을 자신에게 허한 것이다.
비록 아주 짧더라도 누구보다도 소중한 자신을 최고의 위치에 두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지닌 것 별로 없이 무심하게 지낸 투명한 휴식의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그치유의 시간 속에는눈물 나는 작은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