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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Aug 26. 2019

영어 계속 못하는 이야기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서

5기-영어의 필요성을 어느때보다 실감하지만 공부는 하지 않는 상태 (진행중)

해외사업팀에 지원하고 대표님과 면담을 하는데, 영어를 좀 하느냐고 물어보셨다. ‘조금’ 합니다. 그 증거로 밴쿠버에서의 생활을 내밀었다. 리터럴리 A little bit의 의미 었는데 겸손의 의미로 받아들이신 것 같다. 띄엄띄엄이지만 알아는 듣고, 또 한-베 통역이 있을 거라고 해서 어쨌거나 가벼운 마음이었다. 사이공에서 일을 시작하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영어에 업혀서 업체와 미팅도 했다. '뭐 괜찮구먼 그래.'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전날 새벽까지 겨우겨우 스크립트를 쓰고, 동료의 검수까지 받았지만 발표는 다뤄야 하는 내용에 비해 훨씬 빠르게 끝이 났다. 그 세밀하고, 예민한 부분을 설명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 같은 생각에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어로 일을 하는 건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어쩐지 잘 해낼 것 같았던 마음이 바사삭하고 부서졌다.

런칭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베트남 멤버들과 일을 시작하면서는 번역기가 필수가 됐다. ‘번역기 같은 영어’라고 놀린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사이에 이만큼이나 발전한 머신러닝에 감탄하면서 때론 선생님처럼 모셨고, 때론 비서처럼 부렸다. 한국어로 메일에 쓸 내용을 정리하고, 국어 정서법 시간에 이렇게 쓰지 말라고 배운 번역투 문장으로 일부러 고쳤다. 일종의 애벌 번역이었다. 그래야 번역기가 잘 돌아갔다. “나는 너에게 친절히 리마인드 한다. 너는 예산 파일을 메일로 첨부해 주는 게 어떻니? 마감은 세 시 이전에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하고 싶다.” 로 쓰는 식이었다. 그런 다음 번역기가 내놓은 결과물에서 모르는 단어나 어색해 보이는 단어를 골라 내가 이해한 단어로 고르고 다듬어 메일을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위해 심호흡이 필요했다. 그래 놓고도 수신인이 내 의도를 100% 이해했을지 아니 내 영어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100% 담았는지 찜찜한 마음이었다.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어가 쑥쑥 늘어서 번역기 없이도 얼마든지 메일을 쓰고, 영어 회의도 문제없으며...라고 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영화 같지 않다. 분명 나아졌지만 잘하는 건 아니었다. 메일 쓰는 속도가 야악간 빨라졌고, 영어를 쓰면서 오는 스트레스가 쪼오끔 줄고, 서로의 배경지식이 같아지면서 설명이 짧아진 정도. 그게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그러는 사이 '못하지 않는다'라는 피드백을 들었다. 주눅 들 만큼은 부족하지 않다는 평가였다. 밴쿠버에서 쓴 내 전재산을 떠올렸다. 돈을 허공에 뿌린 건 아니었구나.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주눅이 들었던가. 그건 한 번도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주로 잘하는 사람 앞에서 더 못 하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여전히 못하지 않지만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라는 게 문제였다. 고민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라 영어를 붙잡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한 없이 뒤로 미루고 싶었다.

이만큼은 해야 잘하는 거지 하는 기준은 있는데 얼마만큼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모국어에 비춰 '어마어마하게 해야 되겠지.'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하기 싫다. 국문을 전공했지만 지금도 매일 하루면 다섯 번쯤 국어사전을 뒤적인다. 문장 하나 쓸 때도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르느라 시간이 점점 오래 걸릴 지경인데 이런 언어를 어떻게 하나 더 만드나. 다들 얼마나 영어를 좋아했으면 어떻게 지독하게 붙잡았으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됐을까. 정말이지 자신이 없어서 '이런 내 영어도 괜찮아!' 하고 차라리 정신 승리하고 싶다.

a little bit의 비루한 영어라도 쥐고 있지 않았다면 내게는 해외에서 일할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긴 했으니까 잘했다 짝짝짝 하고 영원히 봉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를 기본기로 장착한 사람들의 무대가 어떻게 넓어지는지 눈으로 보았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괜한 엄마를 소환해 투정을 부리고 싶다.

'엄마, 나 왜 영어공부 안 시켰어? 왜 나 윤선생 안 시켰어 응?'

영어 못하는 1-4기를 지나 무려 해외근무를 하며 환골탈태하는 그래서 서른에 못해낸 영어를 마흔에는 극복하는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설마 외국에서 영어로 일까지 하고 왔는데 영어에 대한 자신감 하나 못 얻고 여전히 영어 못하는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백 번의 소개팅 끝에 백 한 번째 소개팅에서 운명의 주인공을 만나는 게 로맨틱 드라마의 공식이라면 백 번의 소개팅 끝에 첫 번째 선을 보게 되는 게 내 이야기의 공식이다.

그래서 아마도 거의 확실히 나는 야나두에 등록할 것 같다. 쉰 즈음에는 진짜 포기를 하든가 정신 승리를 하든가 영어를 극복하든가 뭐라도 하겠지 뭐.


#계간손혜진 #어른의일 #출근 과 #취향 그 어디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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