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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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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Aug 22. 2019

영어 되게 못하는 이야기 1

1기부터 4기까지

1기 - 나는 영어를 못하는구나
영어 콤플렉스는 고등학교 때 시작되었다. 우리 학교는 교육청 지정으로 수행평가 시범학교였는데 그 옛날 옛적에 객관식 평가 말고,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받는 실험대상으로 의사와 상관없이 채택되었다. 그 바람에 여러 신기한 활동을 했는데 수학같이 객관식 평가가 전부일 것 같은 과목조차 풀이과정을 평가하는 식이었다. 영어는 좀 더 공격적이라 말하기와 쓰기를 평가했다. 질문 리스트가 있었고, 리스트에 해당하는 답을 각자 작성하고 (아마도 외운 뒤), 평가 당일에는 질문을 제비 뽑아, 이미 연습했던 대답을 했다. 불행히도 네이버도 없고 당연 번역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교과서 암기를 중심으로 근근이 중학시절을 보낸 영어 무지렁이에겐 대답을 미리 작성하는 것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질문의 난이도는 왓츠 유어 하비 와이 두유 라이크 뎃 (하비) 정도였는데 질문도 명확히 못 알아 들었고 답변도 거의 못했다. 꽤나 모범생으로 살아왔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평가를 망쳐본 건 인생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도 시험 보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나는 영어를 못하는구나.’ 생각해보면 영어를 잘하던 친구들은 당연히 교과 외의 시간을 영어에 투자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도 모르고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강하지 않았던 나는 시작된 콤플렉스를 어쩌지 못하고 방치해두었다.

2기 - 나는 영어를 진짜 못하는구나
두 번째 사건은 대학에서 일어났다. 무사히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에 합격했고 대학 수업이란 게 심심할 만큼 고등학교 공부보다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영어 수업만큼은 난이도가 남달랐다. 당시에 영어 필수 교양을 원어민 강사가 영어로만 진행하는 학교는 많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학교였다. 영어 필수 수업은 말하기와 쓰기 두 영역 중심이었는데 말하기 수업에서는 C0를 쓰기 수업에서는 C+를 받았다. 출석과 숙제를 모두 채웠는데도 그랬다. 대학성적표에 남은 C는 그 두 과목이 전부였다. 재수강을 시도하지 않은 건 다시 한다 해도 더 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안 한 것도 아니요, 포기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그저 그게 내 실력이었다. 수능용 영어 지문을 반복적으로 읽어대며 쌓아온 영어실력은 말하기와 쓰기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진짜 영어를 못해. 그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3기 - 토익은 영어가 아니구나
나의 데뷔 토익점수는 수능 점수와 비슷했다. 그건 백두산 천지 괴물 같은 거였다. 소문은 들었지만 진짜 그 점수를 얻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그 점수가 나올만한 사람은 아예 시험을 치르지 않거나 일찌감치 토익이 없어도 되는 길을 택하는 모양이었다. 취직할 때 도움이 된다는 점수는 통상 850점 이상이었다. 다들 그 정도 점수를 얻어야 시험을 멈췄다. 첫 토익시험을 치르고 일 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매월 토익시험을 치렀다. 어떤 때는 50점, 어떤 때는 100점도 올랐지만 여전히 없느니만 못한 점수였다. 내 딴에는 학원도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들은 결과였지만 졸업장 말고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백수가 된 다음에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처지의 친구 한 명과 “막토”라는 토익 스터디를 결성했다. “막다른 토익”이란 뜻이었지만 사실은 막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이 반영된 포스트 모더니즘적 이름이었다. 우리는 격일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10시부터는 단어 시간이었다. 우리는 전날 공부한 단어 쪽지 시험을 보고, 이어 발음과 뜻을 소리 내어 읽었다. 어설픈 연상법도 동원됐다. 레가 씨 legacy의 유산 이 그때 외워서 남은 단어다. 다음 시간은 문법 모의고사 시간. 그리고 점심을 먹고 1.5배속으로 모의고사 풀이 인강을 듣는다. 오후 시간에는 듣기 스크립트를 받아썼다. 잘 안 들리면 들릴 때까지 반복하며 받아쓰고 또 썼다. 스터디를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났때 우리는 드.디.어. 인생 처음으로 700점을 넘겼다. 기뻐하기엔 아직 초라한 점수였지만 그 사이에 나는 토익점수가 필요 없는 회사에 취직을 하고, 친구는 공인중개사 수험생이 되며 스터디는 와해되었다. 고무적인 결과였지만 “하면 된다!” 같은 교훈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에는 ‘토익은 토익일 뿐 영어가 아니다.’ 하는 생각도 있었다.

4기 - 영어 한 번 잘해보고 싶지만 여전하구나
다시 영어 콤플렉스가 스물스물 하고 기어올라온 건 서른을 맞던 해였다. 짐짓 모르는 척했지만 ‘서른’ 즈음의 인생은 이보다 멋져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멋지지 못한 탓을 영어로 돌렸다. 영어가 잘못했으니 혼을 내줘야겠다. 그 길로 유학원을 찾아 연수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비행기 표를 샀다. 출퇴근 때 읽던 책을 끊고 대신 영어 동영상을 봤다. 주말엔 아침부터 영어학원에 갔다. 애써 부인했지만 ‘늦었다’라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밴쿠버에 머문 10개월 중 8개월은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영어공부만 했다. 하루 종일 다른 언어에 노출된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쓰러져 잠들었다가 죄책감을 느끼며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흔했다. 영어가 늘긴 늘었다. 매달 레벨업에 성공했고, 페이스북에 남기는 영어 문장이 좀 더 길어졌고, 친구들과의 대화도 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실력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유학이나 해외취업을 목표로 한다고 하면 ‘너는 그렇구나.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토익스피킹 시험을 치렀다. 레벨 6였다. 토익도 다시 치렀다. 점수는 750점. 나는 시험이 모든 영어실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자위했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 중에 토익 점수가 낮은 사람은 없었다. 다시 취업을 하면서 그 사이 향상된 내 영어실력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사실 별 상관없었다. 이전보다 나아. '그래도 이제 입은 떼.' 라는 생각 정도. 그게 다였다.


그런 실력으로 무려 해외파견근무에 지원하는 5기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다음 편에 다시 쓰겠다.


#계간손혜진 #어른의일 #출근 #취향 그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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