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동안 글을 썼다 고쳤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19금 소재, 민감한 문제니까.'라고 생각했지만 글의 제목을 먼저 정하면서 쓰려고 했던 글을 생각했을 때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섹스를 섹스라고 부르지 못하고 살았다.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섹스가 들어간 고유 명사를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명사로 말하거나 다른 동사로 돌려 부르거나 같은 의미의 한자어를 가져다 썼다. 섹스를 섹스라고 부른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글로 쓰는 것은 그보다는 빨랐지만 못지않게 오래 걸렸다. 지금까지도 섹스라는 단어를 눈앞에서 들을 때면 움찔거린다. 내 혀끝에서 섹스라는 말이 나올 때면 더하다. 금기를 어기는 것처럼 죄책감과 쾌감이 함께 따라와 붙었다.
원래 이제는 당당히 섹스를 섹스로 부르겠다는 선언 같은 글이었다. 비속어도 은어도 아닌 그저 성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를 말하는 것을 글로써 선언할 만큼 성을 금기시 해온 문화와 그 문화에 길들여진 나에게서 벗어나고자 한 글이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돌아보지 못하고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섹스를 대했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이었다.
몇 주째 이 글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깨달았다. 여전히 '섹스'를 이야기하는 내가 어떻게 보일 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도 링크를 올리는데 특히 페이스북 친구들이 마음에 걸렸다. 나의 페이스북 친구인 목사님, 교수님, 대표님, 가족을 떠올렸고, 혹시 나를 되바라지게 볼지도 모르는다는 생각에 움츠렸다.
남들의 시선과 자라온 환경에 억눌려 살았지만 내가 억눌렸는지도 모르고 줄곧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 나의 욕구와 욕망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덮어놓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섹스에 대한 나의 생각과 요구는 빈칸일 때가 많았다. 때로 대답이 필요하면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나 상대의 생각으로 채워졌다. 내 안에 기준이 없으니 섹스는 금방 버거워졌고, 그 부담을 친구들에게 던지는 싸구려 농담들로 해소하려 들었다. 그땐 그게 '쿨하다'고도 생각했다. 나의 섹스는 너무 무거워서 오히려 쉽게 가벼워졌다.
섹스도 몰랐지만 '나'도 몰랐다.
섹스를 섹스로 부르지도 못하는 내가 섹스를 하고 싶은지 아닌지, 섹스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무얼 원하고 무얼 원하지 않는지 제대로 파악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섹스를 섹스로 부르기로 굳이 선언한다. 이건 내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해지는 동시에 그 욕망에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나의 원칙을 더 먼저 두겠다. 내 섹스는 내 것이니까.
연애가 만병통치약인 줄 알았던 시절에는 좋은 사람만 만나면 섹스고 뭐고 모든 문제가 짠 하고 해결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그러니까 결국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연애고 뭐고 잘할 수 있는 거였다.
더 나은 섹스, 연애, 삶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다음을 함께 소리 내어 읽어보기를 권한다.
섹스, Sex, 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