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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Aug 13. 2019

퇴사 말고 퇴근

퇴사 열풍에 대한 짧은 생각들

내 꿈은 출근
출근이 꿈이었던 때가 있었다. 경력 있는 신입을 찾는 대한민국의 취업시장에서 어쩌면 모두가 출근을 꿈꿨을 것이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오면 출근이 꿈이던 때를 생각하곤 했다. 정말 그만둘 만큼 힘든가?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보통은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다. 그만둘 만큼 힘들 때에는 동료, 고객, 프로젝트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 심지어 내가 곧 떠날지도 모르는 회사의 신뢰도 하락을 걱정하는 게 출근을 이어갈 동력이 됐다. 그래도 퇴사가 꿈인 적은 없었다. 퇴사가 꿈이 되기 전에 미리미리 퇴사를 한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일까. 그러고 보니 벌써 퇴사만 네 번을 했다.

퇴사라는 트렌드
네 번의 퇴사와 다섯 번의 입사를 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퇴사를 했는지, 아니면 퇴사를 꿈꿨는지 퇴사가 트렌드가 됐다. 마치 퇴사를 권하듯 서점에는 퇴사와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퇴사 학교까지 생겼다. 퇴사는 힙했고, 출근은 어느새 촌스러워졌다.

워라밸이란 무엇인가?
퇴사 열풍과 궤를 같이 한 단어는 워라밸이었다. 좋은 회사의 기준이나 퇴사의 이유로 ‘워라밸’이 자주 언급됐다. 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어떻게 해도 일과 삶은 균형을 맞출 수 없다. 일 또한 삶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과 삶을 대립구도로 두었을 때 일은 삶을 이길 방도가 없다. (물론 일하는 시간과 개인 시간의 밸런스라는 의미로 쓰였을 테지만) 일이 감히 삶에 도전했으므로 회사는 쉽게 '나쁜 것'이 된다. 진짜 워라밸은 회사 안에서의 내 삶에 있는 게 아닐까. 회사라는 이익집단 안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온전히 '나’일 수 있다면 그것이 워라밸이라고. 그렇게 퇴사를 가르는 기준이 생겼다. 워라밸아니고 워러밸. work-learning balance. 일과 조직에서 더 이상 배우고 싶은 게 없을 때 나는 더 이상 '나'일 수 없고 그래서 나는 떠났다.

퇴사 권하는 사회
왕후장상의 퇴사가 따로 있다. 퇴사 관련 책의 저자나 그 저자를 미디어에서 어떻게 소개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퇴사한 회사의 '급'이다. 서울대 나오면 분식집을 해도 성공한다는 신화가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신화로 바뀐 느낌이다. 그들이 버리고 나온 것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는지에 따라 퇴사의 가치가 달라진다. 그런 식의 퇴사 소비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된다. 많이 가졌었으니 그 자리를 떠나 잃은 것이 많겠으나 어떤 이들은 너무 적게 가져서 어느 하나라도 잃어서는 안 되니까. 가진 것과 상관없이 자리를 지키고 싶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고. 하지만 미디어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내 삶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회사 안에서 내 삶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출근은 자유의 반대말이 됐고, 퇴사는 자아 찾기의 입구가 됐다.

퇴사 후 떠나는 나를 찾는 여행
회사를 다니며 떠나는 여행에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면 그건 기간이 짧아서거나 여행지가 삶의 터전과 너무 가깝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워본다. 퇴사 후 세계여행, 퇴사 후 외국에서 한 달 살기는 들불처럼 번졌다. 퇴사하고 여행을 안 하면 퇴사가 취소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퇴사 다음이 여행이 아내라 여행을 위한 퇴사인 경우도 보았다. 퇴사 후 1년 동안 세계여행을 떠났던 친구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왜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퇴사를 했냐고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정답은 휴가가 짧아서. 연차 15일을 한 번에 다 쓰게 하는 회사도 드물고, 편도로 2일씩 걸리는 여행지에 고작 열흘 남짓한 일정으로 갈 사람도 적으니까. 내 삶이 중요해서 퇴사를 하는 게 아니라 일 년에 2-3주의 시간도 오롯이 내 것일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회사를 떠나는 건 아닐까. 30년을 넘게 살아도 못 찾은 나를 3주 아프리카 다녀오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휴가 좀 그렇게 쓸 수 있게 줘라 쫌. 미디어가 젊은 대기업 퇴사자 인터뷰에 열을 올리는 대신 2, 3주는 충분히 여행할 수 있는 휴가제도와 문화를 갖춘 회사의 근속연수를 취재하면 어떨까. 사람들이 퇴사나 해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회에서 회사는 나쁜 곳이 맞다.

퇴사 말고 퇴근
누구나 언제든 원할 때 퇴사하고, 마음먹으면 출근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퇴사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거나 트렌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퇴사하는 사람은 영웅이고 출근하는 사람은 겁쟁이가 되거나 반대로 출근하는 사람은 승리자고 퇴사하는 사람은 낙오자 취급을 받을 필요도 없다. 떠나는 것만큼 남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내게 출근을 허락한 이 회사는 내가 고른 회사라는 걸 가끔 잊는다. 매일 이 회사에 남는 걸 선택한다는 사실은 더 자주 잊는다. 역시 나는 퇴사보다는 퇴근이 훨씬 좋다. 지금이 출근시간인 건 비밀이지만.


#어른의일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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