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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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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Nov 21. 2019

우리집엔 냉장고가 산다.

공과금을 대하는 자세

부모님과 살 때는 공과금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으니 첫 공과금 고지서를 기다리는 나는 긴장상태였다. 독립 선배들은 그래 봤자 원룸이고, 혼자 살면 얼마 안 나온다고 했지만 ‘얼마 안 나오는’ 기준이 내겐 없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공과금을 못내 수도와 전기가 끊기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걸 보면 못 낼 만큼 많은 돈이 나온다는 것 아닌가? 고지서를 받고 보니 때가 되면 예상한 만큼의 돈이 들어오는 월급생활자에게는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기, 가스, 인터넷, 관리비(수도요금 포함)로 묶어보자면 전체 생활비에서 비중이 작은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내가 치르지 않았던 비용 항목이 갑자기 넷이나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용돈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공과금을 절약하는 만큼 내가 쓸 돈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 비용을 줄이는 게 독립 초반의 주 관심사였다.





인터넷 가입하면 코트가 생겨요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지역 케이블의 인터넷을 이용했다. 오래 사용하던 유선방송에서 인터넷 서비스도 한다길래 비교고 뭐고 없이 가입해서 10년을 넘게 썼다. 지역 케이블은 네임밸류가 낮아서인지 S*이니 L*이니 하는 브랜드들보다 보통 요금이 저렴한 편인데 결정을 하려니 품질이 괜히 불안했다. 그래서 믿음직한 대기업 인터넷을 골랐다기보다 3년 약정을 하면 백화점 상품권을 준다기에 골랐다. 그리고 그 상품권은 나의 회색 코트가 되었다. 집 계약기간이 2년이라 3년 약정을 못 지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그러면 받은 사은품을 뱉어내야 한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더니 어느새 3년이 지나있었다. 귀찮음에 지지만 않는다면 약정이 끝나는 시점에 다른 브랜드로 이동하거나 재약정하는 방법으로 코트를 또 살 수도 있다지만 나는 졌다.

가스요금이 얼마나 무섭게요
인천 집은 단독주택이었다. 소음에 자유롭고, 사생활도 제법 지켜지고, 마당에 감나무도 있고 좋은 점이 정말 많았지만 겨울에 취약했다. 공동주택들은 좌우, 위아래로 집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자연스럽게 보온이 되지만 단독주택은 사방에서 열을 빼앗길 뿐이었다. 엄마는 가스요금을 낼 자에게만 실내온도를 높일 자격이 있다고 했다. 나는 자격을 포기했다. 우리는 극세사 잠옷에 두꺼운 수면양말까지 동원해서 방 안에서도 코끝이 시린 겨울을 나곤 했다. 그런(?) 집에서 살았지만 엄마는 초겨울에 독립한 내가 걱정이었다. 자꾸만 전화를 걸어 춥지 않냐고 물었다. “엄마 우리집(인천)보다 추운 집은 없어.” 전화 저편의 엄마가 웃었다.

우리집(창천)은 양옆과 위아래로 다른 집에 싸여 있어 애초에 공기가 별로 차갑지 않았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나 잠깐씩 보일러를 돌려 공기를 덥혔다. 그래도 추우면 집에서 공수한 전기장판을 켰다. 어떻게 해도 단독주택의 겨울보다 따뜻했기 때문이었지만 누구도 이 집의 가스요금을 대신 내주지 않는다는 것도 컸다. 가스요금이 제일 무서웠다. 어디까지 따뜻해도 될지 감이 안 잡혔고, 마냥 아끼는 게 답도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도 난방을 너무 안 하면 보일러가 동파되어서 더 큰 비용을 만날 수 있다는 괴담이 온 도시에 흉흉했다. 실내온도 18~19도에 보일러를 맞춰놓고 그 온도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극세사 잠옷과 수면양말은 여전히 필요했다. 코끝이 시릴 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서늘한 겨울을 보내고 한 달 2만 원 안팎의 명세서를 받아 들었다. 휴우 춥지만 잘 싸웠다.

우리집엔 냉장고가 산다
독립을 해서 회사와 집이 가까워졌지만 내가 회사 근처로 이사 왔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일이 늘었다. 새벽에 퇴근해 아침에 출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주말이면 인천집에 다녀왔다. 자는 시간을 빼면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집에 들어간 돈이 아까웠다. 야근이 유독 많던 달에 나온 전기요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2700원. 이 정도면 사람이 산다기보다 냉장고가 사는 거 아닌가. 이 집에서의 내 존재감이 냉장고만도 못하다니... 하면서 전기요금이 조금 나와서 좋아하는 내 안의 어떤 자아가 엷게 웃었다. 안 쓰는 코드는 뽑아놓길 잘했다면서.

여름은 또 다른 이야기다. 냉장고와 함께 에어컨이 사니까. 에어컨 바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옵션으로 들어있는 오래된 에어컨의 소음이 싫어서 선풍기를 주로 쓰지만 선풍기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날도 많다. 추위는 전기장판에 극세사에 핫팩이라도 동원해 어찌어찌 넘어간다 해도 더위는 도무지 대안이 없다. 보통은 대안이 없을 때나 되어야지 에어컨을 등장시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더운 게 싫어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출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너무 궁상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지 아니지. 퇴근하자마자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욕실로 직행해 씻고 나오면 하루 종일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던 것만 같은 뽀송뽀송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데 굳이?





조금 궁상맞게, 약간 더 귀찮게 살면 한 달에 오천 원에서 만 원쯤 아낄 수 있다. 일 년이면 12만 원, 10년 이면 120만 원, 무려 100년이면 겨우 1200만 원....에이X!!! 때려쳐! 사실상 치킨 한 마리 덜 먹는 게 에어컨 며칠 안 트는 것보다 더 많이 아끼는 것이지만 아마도 나는 여름이 오면 2만 원 짜리 치킨을 시켜놓고 찬물로 머리를 감을 것이다. 하하. 그래도 뭐라 하는 사람 없어서 좋은 독립만세.


#어른의일 #독립 #공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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