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과 투룸
밴쿠버에서 블루베리를 먹었는데 어딘지 낯설었다. 왜지? 곧 낯섦의 원인이 밝혀졌다. 냉동이 아닌 블루베리를 처음 먹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애플 망고를 먹었을 때는 낯섦이 조금 더했다. 얼지 않은 망고를 먹은 건 역시 처음이었는데 베리류 보다 과육이 크고, 당도가 높은 까닭인지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내가 먹어본 베리류와 망고류는 모두 얼렸거나 건조됐거나 설탕에 저려진 것뿐이었다. 나는 밴쿠버에서 블루베리의 원산지가 북아메리카인 것도 처음 알았고, 망고의 배를 가르면 갈빗대 같은 커다란 씨앗이 나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지금은 가격대가 많이 내려온 데다가 구하기도 제법 쉽지만 어학연수를 떠났던 해만 해도 블루베리와 망고는 한국에서 좀 귀한 과일이었다. 내가 먹은 애플 망고는 개당 2~3천 원 꼴이었는데 멕시코 어딘가에서 온 친구였다. 그러니까 수입산. 한국에서 내가 만난 망고는 보통 필리핀 어딘가에서 온 친구들인데 주로 백화점에서 스티로폼 그물망에 싸인채 개당 만 원 정도에 팔렸다. 캐나다도 망고는 수입이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텐데 대체 한국 망고 값은 왜 이렇게 비싼 거야?
망고 갈비에 붙어있는 과육을 뜯어먹으며 이 맛은 몰랐어도 좋을 맛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적당한 값으로 먹을 수 있어 다행이지만 한국에서는 못 먹을 테니까. '먹어보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은 다르다.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망고맛을 알았고, 망고가 먹고 싶어 질 것이고, 먹지 못하면 그리워질 것도 알았다. 망고를 먹고 싶지만 쉬이 먹을 수 없는 나를 마주할 때면 조금 불행할 것 같았다. 아예 몰랐어도 좋을 만큼 망고는 맛있었다.
사이공에서 일하는 동안은 회사에서 숙소를 지원해 줬다. 혼자 방 하나 거실 하나 욕실 하나가 달린 15평형 아파트에 살다가 홍대 집으로 돌아왔더니 답답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치챈 것은 아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문득 ‘아 이제 방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들어갈 방이 없어서 깨달았다.
휴식과 생활의 공간이 분리된 곳에 살다가 모든 것이 한 데 섞여있는 곳에 돌아오니 보였다. 이사를 가야겠어. 그리고 세 달 뒤 방 두 칸에 작은 거실과 부엌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렇게 한 줄로 줄이기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사이공에서 아파트를 겪지 못했다면 홍대 집이 좁은 줄 모르고 몇 년쯤 더 살았을 것이다. 새집에 퀸사이즈의 침대가 들어오고, 한 칸이었던 옷장이 두 칸짜리가 되고, 테이블이 들어온 어느 날, 방에서 나와(나오다니!) 모퉁이(모퉁이라니!)를 돌아(돌다니!) 화장실로 들어가 비데가 설치된 변기에 앉았는데 ‘아 이제 아마도 아니! 확실히 원룸으로 돌아갈 수 없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밴쿠버에서 먹었던 망고가 기억났다. 몰랐어도 좋았을 만큼 맛있었던 망고.
혹시나 원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불행할까?
가끔 TV에서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빚쟁이들의 독촉을 받았다, 집이 너무 어려웠지만 노력 끝에 연예인이 되었고 얼마 전에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 같은 사연을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진 게 있는 사람이나 잃을 수 있으니까.
50평 살던 사람은 30평으로 이사를 가면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5평 살던 사람은 30평으로 이사를 가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30평에 살더라도 50평에 살았던 사람이 5평에 살았던 사람보다 더욱 50평에 살고 싶지 않을까? 하나하나의 사연을 다 알 수는 없지만 50평의 삶에는 위치에너지가 있을 거 같다. 다시 50평 이상의 삶을 살게 될 때까지 올라갈 수 있는 힘 같은 것. 50평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관성 같은 것. 그게 있어서 남들보다 더 노력할 수 있고, 연예인이 되었고, 돈을 벌 수 있었는지도 몰라. 안 그래?
일이 틀어져 원룸으로 돌아간다면 며칠쯤 불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다시 투룸으로 가야지. 은행에서 대출을 많이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에 내 집도 한 번 가져 봐야지’하고 마음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투룸의 위치에너지를 가졌으니까. 망고맛을 알아버렸으니까. 누구도 망고를 먹기 전과 먹은 후가 같을 수 없으니까.
이제 망고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몰랐어도 좋을 맛' 같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는 몰랐어도 좋은 것보다 알아서 좋은 게 훨씬 많다. 대신 달 한 간, 나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는 만족은 이제 없을 것이다. 뭐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따뜻한 변기 위에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른의일 #취향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