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출할 때 먹으려고 낱개로 포장된 견과를 구비해 두었다. 호두, 아몬드, 캐슈너트 같은 견과와 블루베리나 건포도 같은 말린 과일이 들어있는데 간혹 이름을 잘 모르겠는 딱딱한 견과도 섞여 있었다. 아마 볶은 검은콩이겠거니 하면서 씹어 먹곤 했다.
그날도 출출해서 견과를 한 봉 먹는데 딱딱한 견과가 걸렸다. 어금니로 '앙' 물어 오독오독 씹어 넘겼다. 견과 한 봉은 언제나 좀 아쉬운 양이라 금방 다 먹고 입맛을 '쩝' 다시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어금니에 혀를 가져다 댔다.
하아... 매끈해야 할 겉면이 꺼끌거렸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렸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충치를 때운 곳이 깨져있었다. 견과를 ‘앙’하고 물 때 깨진 모양이었다. 에휴, 이게 벌써 몇 번째야.
7년 전에 맘을 먹고 이를 싹 점검했다. 병원에서 추천하는 치아 색깔의 소재로 충치도 몇 개 때웠다. 꽤 큰돈이 들었지만 한 번 점검을 하니 마음이 제법 든든했다. 그런데 1~2년에 한 번 꼴로 충치를 때운 곳이 깨져 나갔다. 첫 번째는 호박엿을 먹다가 그랬고, 두 번째는 누군가 상하이에서 사 온 캐러멜을 먹다가 그랬다. 둘 다 너무 딱딱하고 끈적이는 음식이라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이쮸를 먹다가 깨졌을 때는 화가 났다. 마이쮸는 안 딱딱하잖아! 이 정도면 많이 끈적이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돈과 함께 마이쮸를 잃었다. 그런데 견과를 먹다가 이가 깨지다니. 껍질이 단단한 거지 알맹이가 단단한 것도 아닌데. 마이쮸를 잃은 내게서 땅콩까지 빼앗겠다고? 거 너무 잔인한 거 아니오?
어렸을 때는 치과가 그리 무섭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조금만 참으면 엄마가 선물을 사줬다. 치과가 무섭다고 우는 친구들이 이해가 잘 안 됐다.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퍼즐도 사주고 땅콩과자도 사주는데 저걸 못 참는담... 하고 생각했다.
그런 씩씩한 어린이였는데 어른이 되어 온 치과는 오히려 무서웠다. 눈을 가리고 위잉대는 기계 소리를 들을 때면 단단한 이도 갈아내는 저 기계가 내 입안을 도려내지는 않을지 혹 멀쩡한 이까지 깨부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안 무서웠는데 어떻게 어른이 되어 더 무서울 수가 있을까.
사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치료비였다. 공포를 참아내도 선물은 없었고, 치료비를 내주는 엄마는 더더욱 없었다. 치아색 소재로 때운 곳이 깨져나갈 때마다 내구성이 더 좋다는 금으로 바꿨고 그때마다 3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었다. 오늘 나는 30만 원짜리 땅콩을 먹었구나. 그것 참 비싸기도 하지...
콩 한쪽에 없어질 30만 원을 생각하니 마음이 마구 무거워지려고 했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쉬운 문제지. 지금 당장 30만 원을 동원할 수 있는 잔고와 그 정도 돈이 없어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 나의 생활을 기뻐하자. 기계 소리는 무서워할지언정 치료비는 무서워하지 말자.
빠르게 수소문하여 동네에 괜찮다는 치과를 찾았다.
“레진으로 때우면 될 것 같고요, 비용은 10만 원입니다.”
오오 10만 원이라니. 20만 원 벌었으니 집에 가는 길에 쇼핑을 해야지. 잘 참은 내게 선물을 사줘야지. 후훗. 어른할 맛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