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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ze Nov 04. 2024

행복도 불행도 아닌 다행인 퍼펙트데이즈

푸석함이 깃든 생활의 낭만



푸석함이 깃든 생활에는 낭만이 들어올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출근 전 푸석한 얼굴을 하고 일어나도 하늘을 올라다보며 싱긋 웃고, 오늘 들을 노래를 신중히 골라 나만의 타이밍에 플레이하고,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매일을 성실히 기록하는 것. 그런 일상 자체가 낭만이었다. 나의 푸석한 생활에는 늘 낭만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나에게 10월은 일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한 달이었다. 아직도 일상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감사함을 느끼며, 할 수 있는 만큼 회복하고 있다. 고통스러웠던 입원 기간이 끝나고, 엄마 집에서 돌봄을 받다가 드디어 내 두 발로 걷고, 제대로 먹고, 숨 쉴 수 있을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새벽에 깨지 않고 푹 잤던 날이었다. 몇 주 동안 앉아서 잠을 잤고, 잠을 잤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새벽 내내 통증 때문에 잠에 들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마음이 편해졌는지, 회복이 많이 된 건지 처음으로 푹 자고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우리집은 가을 볕이 가장 아름답다. 그 아름답고, 깊고, 노란 가을 볕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창문을 열고, 공기를 크게 들이 마셨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타서 일기장을 펴고 앉은 그 순간 ‘되찾은 일상’에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제대로 숨 쉬지도, 걷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몇 주였다. 삶의 기본적인 생활을 잃으니 ‘생활’이 그리웠다. 당연하고, 익숙했던 일상의 풍경들. 그동안 내가 누리고 있던 생활이 얼마나 귀했던지.


요즘은 다시 점심시간에 양재천을 걷고,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나무와 햇볕을 누리며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다. 그 모습을 본 예린이 퍼펙트데이즈의 장면같다고 했다. 코모레비를 보며 웃음짓는 주인공의 모습같다고. 퍼펙트데이즈는 상영 시작부터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 말을 들어버린 이상 당장 보러갈 수 밖에 없었다. 끝나가는 가을 날, 입동을 3일 남기고 가을날의 오후 퍼펙트데이즈를 보러갔다. 신사 브로드웨이에 도착해 ‘극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점에서 확인해주는 검표를 마친 뒤 상영관에 앉았다. 아주 작은 상영관에 4명이 있었다. 오래된 붉은 천의자에 앉아 화면을 꽉 채우지 않는 영화를 보고 나왔다.


마침 혜영언니에게 선물 받은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 은 영화 평론가인 작가님이 쓰신 책이어서 퍼펙트데이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 이 영화는 지난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기획한 시부야 공중화장실 개선 프로젝트 홍보 영상에서 시작했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는 도쿄 시부야에 있는 일곱개의 화장실을 안도 다다오, 쿠가 켄고, 소우 후지모토, 반 시게루 등 일본의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 16인이 참여해 공중화장실 명소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였다. 처음 빔벤더스 감독이 제안받은 건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로 재탄장한 공중화장실을 소개하는 단편 연작 연출이었지만, 빔벤더스는 이 화장실을 보고 누군가의 인생과 연관된 거점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빔 벤더스 감독은 대학교 독일 영화의 이해 시간에 독일 영화의 거장으로 학습했던 감독이었다. 다 함께 강의실에 앉아 <파리, 텍사스>를 보며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공부했던 기억이 났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그 사이에 공백은 잊고 새삼스레 반가웠다.


원래 영화를 볼 때 그 어떤 줄거리나, 후기를 찾아보지 않고 보는 편인데, 책에서 먼저 읽게 되어 영상에 화장실이 나올 때마다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게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이군, 하며. 히라야마의 하루하루는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할 정도로 평온하고, 루틴하다. 극의 후반부로 갈 수록 반복되던 일상에 여러 변주가 일어나고, 마지막 장면은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깊은 그의 애환까지 보인다.


책에 나온 평론 내용을 덧붙인다면 ‘타고난 평정의 주인 같던 히라마야의 하루하루가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니라면, 그것이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를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버티며 전력을 다해 일으키듯 보내는 매일이라면 <퍼펙트 데이즈> 라는 제목은 첫인상과 달리 심중하게 내려앉는 의미로 가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카세트 테이프와 코모레비, 사우나와 하이볼은 동앗줄이었을 것이다. 전력을 다해 파도 속의 균형을 잡기 위한, 평온을 붙잡기 위한, 다행을 찾기 위한.


“위태롭고 위협적인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간다는 건 마음에 너른 여유가 일찍이 깃든 덕분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매일 다지며 다부진 어제를 덧대고 오늘을 쌓아온 덕분일지도 모른다 -61p-


이렇게 읽고 보니, 아침마다 문을 나서 하늘을 쳐다보며 싱긋 웃던 그 표정이 그만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표정이었을 수도, 스카이타워를 보며 테이프를 밀어넣는 행위가, 모두 다부진 마음을 덧대는 행위였을까.


실제로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 나온 히라야마가 말해주는 그의 과거, 코모레비의 의미를 들으니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이 갔다.



아침마다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하는데 어쩐 연유인지 그동안 게스트 디제이가 빈자리를 채우다 오늘에서야 정지영 디제이가 돌아왔다. “이 라디오의 일상이 너무 그리워 눈물이 날 뻔했다” 고 한다. 일상으로의 복귀가 얼마다 다행스러운 마음인지, 울컥하는 마음인지 불과 몇 주 전에 느껴봤기 때문에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가기 싫어 죽겠는 월요일 출근길의 일상이 귀해졌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틈틈이 즐긴다고 착각하며 견딜 수 있으려면. 그렇기에 요즘은 행복을 바라는 것도, 불행을 이기는 것도 삶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일 같지 않다. 물론 행복이 찾아온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불행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행복을 바라기 위해서, 불행을 이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건 아닌 것 같다. 결국 행복도, 불행도 가끔씩 오는 일이다. 중요한 건 다행이다. 늘 범상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이 있다는 것, 그러한 다행의 나날을 유지하고 지켜내는 것, 그런 다행을 견지하고 견인하며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씩 행복을 맞으며 기뻐할 수도 있고, 불행을 견디며 안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은 늘 다행이다. 인간사가 어찌 됐든 계절은 제 갈길을 간다. 차분하게 맞이하고, 단단하게 여문다. 늘 거기에 있고, 늘 거기서 온다. 매번 추운 겨울을 이기는 건 결국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선연해지는 건 나아간다는 의지보다도 돌아온다는 믿음인 것 같다. 이렇듯 자연처럼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참 다행이지 않을까.’ - 63p


결국 행복도 불행도 아닌 다행이 이긴다.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 표지에 적힌 이 문장이 나의 10월을 대변한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까. 또 얼마나 많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언라까. 그러니 완벽한 계획은 무용하다. 그저 어떤 흐름을 탈지 물길의 방향성을 정해두고,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며 만나는 암초와 햇볕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지나가는 수밖에.


모든 것은 지나가고, 다시 온다.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온다. 가는 것에 아쉬워할 건지 돌아오는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할건지는 나의 선택. 가는 건 잘 보내주고 오는 건 잘 맞아주자. 하루하루 new day, new life 라는 생각으로. 히라야마의 카세트테이프와 코모레비처럼, 나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코모레비가 있다. 명색이 취미잡화점 호비클럽 대장인데, 나의 생활에 낭만을 깃들게 하는, 나를 웃게하는 목록은 두 손가득 쥐고 있다.


아침에는 기쁘게 일어나 아침 공기 들이마시고, 일기쓰고, 과일과 아침, 따뜻한 차를 챙겨서 출근.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하고, 점심에는 양재천을 걷거나 책을 읽는다.

저녁에는 엄마의 텃밭에서 자라난 작물들로 집밥을 해먹고, 따끈한 물로 샤워하고 일기쓰고, 책 읽다가 잠든다. 이런 일상에 지켜지면 참 다행이겠다.


sometimes i fell so happy,

sometimes i feel so sad.

sometimes i feel so happy,

but mostly you just make me mad.


오늘도 다행이 이겼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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