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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정 Sep 30. 2023

#3. 그 돈은 어떤 돈일까(1)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음반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거의 볼 수 없는 음반가게가 2000년대 초반에는 꽤 많이 있었다. 외관이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가게, 가게 이름도 '오렌지 레코드'였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라 잘 해내고 싶었다. 풀타임이 아니라 부담은 없었다. 오전 11시에 가게 문을 열고 매장 정리를 한 다음, 오후 4시까지 손님들이 원하는 음반을 찾아주고 계산을 하는 게 대부분의 일이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월급은 쥐꼬리였다. 최저임금이 없었던 시절, 한 달 내내 근무를 하고도 벌 수 있는 돈은 30만 원이었다. 게다가 사장은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 법칙을 내걸었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귀했던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학시절 부모님이 주신 용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3만 원, 한 달이면 겨우 12만 원이었다. 갖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차비와 밥값을 제외하면 빠듯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자체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첫 출근날은 이것저것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10평 남짓 되는 작은 가게였지만, 각종 음반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보통은 대중가요 리믹스 테이프를 많이 찾을 거야. 다른 거 달라고 하는데 못 찾겠으면 전화하고."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은 정말 대부분 대중가요 리믹스 테이프를 사갔다. 사장이 아침에 20개를 가져다주면 금세 20개가 다 팔려나갔다. 브라운아이즈 <점점>, 빅마마 <break away>, 휘성 <with me> 등이 담긴 음반이었다. MP3플레이어가 출시되기 시작했지만, 주로 테이프와 CD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었다.


사장은 하루에 한 번 정도 가게에 들러서 가게 상태를 점검하거나, 판매량과 현금을 체크했다. 그의 팔에는 늘 일수 가방 같은 네모난 백이 끼워져 있었다. 그는 노란색 페라리를 몰고 온 동네를 질주했다. 부릉부릉~ 엔진소리가 도로에 울려 퍼질 때면 마치 이 구역의 모든 여자를 꼬셔보겠다는 각오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큰 사고를 겪었던 탓인지 다리 한쪽이 온전치 못했다. 왼쪽 발을 절면서 걸었고, 왼쪽 겨드랑이 아래로 목발이 몸을 지지하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나기 전에는 내가 얼마나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는지 모르지? 나 좋다고 울면서 매달린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은 이런 몸이 되어서..."


묻지도 않았는데 사장은 지난날의 일을 내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젊었고 생김새도 멀끔했다. 멋진 스포츠카와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진 그에게 사고는 기세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사장에게는 오래 만난 것 같은 여자친구가 있었다. 가끔 가게에 와서 시간을 보내다 갔는데, 아담한 키에 얼굴은 예쁘장했다. 늘 미용실에 들르는지 긴 머리는 늘 드라이가 된 상태 거나 웨이브로 출렁거렸다. 순애보 같았던 여자는 사장에게 "오빠, 오빠"하며 상냥하게 굴었다. 반면 사장은 예전 버릇이 그대로 나오는지 여자에게 퉁명스러웠다.


어느 날, 가게에 독특한 손님이 찾아왔다.

군인과 같은 짧은 머리에 검정 베레모를 쓰고 검정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007 가방을 들고 가게 문을 열었다. 그냥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외모였다. 그 남자는 내게 이상한 말을 건넸다.


"볼펜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 알아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네?"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 내가 당신이 서 있는 곳까지 딱 세발자국 거리거든? 단숨에 당신 급소를 찌르면 죽일 수 있다는 거야."


나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놀라지 말아요. 그냥 알려주는 것뿐이니까. 하나, 두울, 셋..."


바로 내 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보면서 나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순간 적막이 흘렀고 소름이 온몸에 돋았다. 그리고 나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겁먹은 것을 티 내면 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손님, 이런 장난치시면 안 되고요. 필요한 음반 있으시면 찾아드릴게요."


"음, 그러면 당신이 추천한 음반으로 골라줘요."


나는 얼른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 CD나 골라 집어 비닐봉지에 담았다.


"이 정도면 될까요?"


"더 많이 담아도 되는데, 가득 담아주면 좋겠는데..."


서둘러 봉투를 내밀며 나는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만 추천해 드릴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지폐를 세지도 않고 뭉치로 내밀고 가게문을 열고 사라졌다. CD를 골라준 것보다 네 배나 더 많은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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