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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Feb 28. 2018

영미가 영미에게

'응미, 응미'

막 두 돌 지난 딸아이가 연거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 한 소리에 놀라 거실로 가니, '영미'를 간절하게 부르는 안경 낀 여자의 얼굴이 TV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어 있었고, 고무장갑을 낀 채 영미는 TV 속의 영미가 밀대같이 생긴 막대로 열심히 빙판을 문지르는 행동을 의아해하다가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영미야. 어쩜. 우리 애들과 신랑은 난리야. 꺼억꺼억. 연애할 때, 나 좋다고 영미야, 영미야 라고 불러대며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처럼 애들과 한통속이 되어서 온종일 영미, 영미라며 키득키득 거리지 뭐니.’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 영미는 숨 넘어갈 듯 꺼억꺼억거렸고, 초등학교 때 똑같은 이름인 것만으로 짓궂은 장난에 놀림받던 영미와 영미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미'라고 부르며 또 유쾌하게 꺼억꺼억, 깔깔거렸다.

'어머, 전화 들어온다. 영미야, 내가 다시 전화할게"

낯선 번호를 확인하고 망설이다 받은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술에 얼큰하게 취하기 딱 직전이면 유독 다정하게 자신을 불러주던 낯익은 목소리였다.


'영미, 잘 지내?'


영미, 영미, 영미야. TV 속의 다급한 목소리와, 혀 짧은 발음으로 그 말을 따라 하는 딸아이의 모습이 순간 아득하게 느껴졌고, 전화기 너머 술 취한 목소리에 다리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내가 당신에게 반한 건, 코스모스를 닮은 당신의 웃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내 첫사랑 영미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던 전 남편의 고백에, 내 친구 영미를 나보다 먼저 만나지 않았던 것이 진짜 당신 운명이라고, 깔깔거리며 웃었던, 어떤 해 겨울이 떠올라 영미는, 빙판 위를 미끄러져가는 TV 속의 영미는 누구에게 또 그토록 애절하게 불리며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수고했어요, 영미. 또한 이 땅의 모든 영미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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