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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Feb 07. 2018

지단의, 지단에 의한, 지단을 위한

축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주말 새벽이면 숙취에도 아랑곳없이 벌떡 일어나서 어설픈 실력으로 운동장의 축구공을 쫓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해외의 축구 경기를 피곤한 줄도 모른 채 다 보고 나서야 벅찬 맘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축구선수들을 죄다 끌어모아놨으니 국내 축구 경기와는 수준이 다른 그들의 플레이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보곤 했었는데 주로 경기 템포가 빠른 프리미어리그를 선호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예외로 프리메라리그를 시청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이름값이 높은 선수들만이 몸담을 수 있었는데 그 많은 스타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지단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 팀을 응원하고 좋아했다.

머리가 벗어진 남자가 섹시할 수도 있다는 것은, 흰 러닝 차림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스크린 안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브루스 윌리스를 보고 먼저 눈치챘지만, 그 섹시함의 요소에 대머리가 필수불가결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지단을 통해서였다.


그라운드 안에서 지단은 왕처럼 명령했고, 장군처럼 지휘했고, 투사처럼 싸웠지만 그 움직임은 한없이 유연했고, 여유로웠다.

그토록 거친 축구경기에서 그처럼 우아한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단의 뼈는 아주 말랑말랑한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특유의 유연한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라고 친구들과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1998년 월드컵과  2000년 유로컵에서 연달아 프랑스에 우승컵을 안기면서 최전성기를 보내던 지단이 2002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레버쿠젠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트린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수비수와 경합하던 로베르토 카를로스가 어렵게 크로스 한 공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골 에어리어 안에 있던 지단을 향했고 지단의 발과 공이 허공에서 만나는 순간은 정말로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는데, 그의 발을 떠난 공은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결승골이 되었다.

그때 나는 어쩌면 저런 골은 태고적부터 정해진 수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종종 축구팬들에게 아름다운 골로 기억되는 모양인데 개인적으로는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발리슛이 아닐까 한다.


시대마다 라이벌이 있어 지금은 호날두와 메시를 곧잘 비교하곤 하지만 당시에는 지단과 호나우두를 비교하며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는 수없이 많은 논쟁들로 시끄러웠는데, 그때도 지금도 나는 변함없는 지단의 편이다.

폭발적인 드리블이나 한 두 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재껴서 골로 연결시키는 호나우두의 몸놀림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고, 드리블 기술의 탁월함이나 패싱력, 슈팅력 등 각 부분별로 두 선수를 비교 분석한 전문가들과 축구팬들의 의견은 늘 분분했지만 지단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발레리노 같은 몸놀림이 나는 황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단이 그라운드 위에 있으면 그 팀은 지단의 팀이었고, 지단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떠한 플레이도 원활하지 않았다.

반짝반짝 빛났고, 눈부셨고 - 대머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 우아했고, 강인했다.

깊은 눈매로 환히 웃는 지단의 얼굴이 TV 화면에 클로즈업되면 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해야 할 만큼 설렜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될 2006년 월드컵 결승 경기 도중, 격분한 지단이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박고 퇴장당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을 때도 난 그저 지단의 전광석화 같은 박치기 실력에 감탄했다.

병석에 계신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마테라치의 말에 참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며 TV로 그 장면을 지켜봤던 어린이들에겐 깊은 사과를 하지만, 마테라치에겐 추호도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지단의 인터뷰를 후에 보고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단의 퇴장과 함께 그 해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으니 마테라치의 비열한 전략이 먹혀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처럼 야비한 방법으로 지단의 화를 돋웠으니 그에 대한 응징으로 박치기쯤은 가벼운 것이고, 오히려 지단의 머리에 박히는 은혜를 입었으니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 소감으로, 지단에게 박치기를 당하던 순간의 가슴 뭉클함이,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감격보다 훨씬 더 황홀했었다고 밝혔다면 그래도, 꽤 괜찮은 축구선수 정도로 나는 마테라치를 기억해 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라운드 위에서 우아한 야생마 같은 지단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가 없을 것은 확실하다. 그래도 가끔씩 열리는 자선축구 행사로 인해 여전히 녹슬지 않은 지단의 경쾌한 몸놀림을 볼 수 있는 행운은 남아있고, 땀에 젖은 유니폼 대신에 핏 감 제대로 살린 슈트를 입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을 지휘하는 감독으로서의 지단의 모습 또한 수시로 볼 수 있다.

넘치는 혈기와 열정으로 때론 과격한 반칙을 해서 축구선수 시절 동안 꽤 많은 퇴장을 당하기도 했지만 저마다 유별난 개성을 가진 자신의 후배들을 형처럼, 삼촌처럼 잘 다독이고 조련해서 감독으로서의 훌륭한 행보를 걷고 있는 지금의 지단의 모습 또한 전성기 시절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최근 부진에 빠진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력과 더불어 지단의 경질설까지 불거지고 있지만 성적에 대한 결과만 놓고 보는 레알 마드리드 수뇌부의 매정한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어디에 몸담고 있던 상관없이, 선수 시절에도 숱한 위기 때마다 자신의 진가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극복했던 모습처럼 그 또한 잘 헤쳐나갈 것임을 나는 믿고 있다.

여전히 잊지 않고 찾는다는 자신의 고향 마르세유에는 그의 오랜 친구들이 변함없이 반겨주고 이주민의 험난했던 삶을 잘 이겨낸 강인한 혈통이 지단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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