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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Feb 01. 2018

역류

해마다 겨울이면 통과의례처럼 작업실의 수도가 한두 번 이상 얼어버리곤 해서, 올 겨울엔 한파가 예고된 전날에는 작정하고 밤새 미세하게 수돗물을 틀어놓아 다행히 여태껏 한 번도 얼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밤새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똑똑 규칙적으로 흐르는 수돗물을 확인하고, 집에 가기 전  습관적으로 작업실을 한번 휙 둘러보니 이상하게 냉장고 밑으로 흥건히 물이 고여 있었다.

교묘한 내 속임수에 겨울 휴가를 얻지 못한 수돗물이 괜한 심술을 부려 냉장고가 고장 났구나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하며, 다음날 해결할 요량으로 우선 냉장고의 전기코드를 빼놓은 채 집으로 귀가했다.

그런데 다음날 작업실로 다시 오니 냉장고 밑에 뿐만 아니라 바닥에 군데군데 물이 흥건했다.

놀란 마음에 벽에 기대어 둔 그림들이 젖지 않도록 우선 이리저리 치우고 나니, 벽면과 바닥의 경계를 따라 외부에서 물이 침범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 상황이 영 이해가 가지 않아, 늘 닫혀 있던 쪽문을 열고 뒤쪽 베란다로 나가보니 세상에, 바닥에 잔뜩 고인물이 온통 꽁꽁 얼어 있었다. 당연히 아래층으로 향하는 배관의 구멍도 꽁꽁 얼어 작업실 안 싱크대에서 배출한 물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베란다 바닥에 넘쳐 얼어붙게 되었고, 그런 상황은 까마득히 모른 채 번번이 수돗물을 사용했으니 얼어붙은 베란다 위를 유영하던 물이 벽의 미세한 균열을 따라 작업실 안으로 역류했던 것이었다.

종일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베란다의 얼음이 녹으려면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고도 수일이 더 걸릴 테고, 붓을 세척하는 것은 고사하고 손조차 씻을 수 없으니 곰처럼 웅크리고 겨우내 진득하게 작업을 하려던 계획은 어긋나 버렸다.

수돗물을 사수했다는, 나름 성공적인 계획에 뿌듯해하다가 뜻하지 않은 역습에 허탈한 웃음만 났다.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채 털어내지 못한 마음의 찌꺼기 또한 쌓이고 쌓이면, 출구를 찾지 못한 채로 헤매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역류해서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된다.


곧 봄이 올 것이니, 이참에 산으로, 들로 얼마 남지 않은 올 겨울의 상쾌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고, 읽다만 책도 실컷 읽고, 보고 싶은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호사를 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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