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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혜진 Mar 29. 2018

리틀 포레스트

지친 친구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


  이 영화에는 칼이 나오지만 누굴 찌르는데 쓰이는 게 아니라 혜원이 요리를 하는데 쓰인다. 밤과 숲이 나오지만 귀신을 등장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혜원에게 조용히 있을 시간을 주려고 나온다. 로맨스가 있지만 그 흔한 포옹이나 키스조차 없고 장난으로 투닥투닥 헤드락을 걸고 넘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혜원이 막걸리는 겨울바람과 함께 먹어야 한다면서 문을 열어두자고 하고 재하는 추우니 문을 닫자고 하는 장면에서다. 문을 열어두려는 건 여자로서 혜원의 촉 같은 걸까. 남자랑 한 공간에 있을 때는 문을 열어둬야 한다는? 혜원의 눈에도 재하가 남자니까? 곧 은숙이도 올 테고. 재하는 자신의 이별도, 혜원의 이별도 천천히 기다린다. 농부처럼. 농부니까. 잘 익은 빨간 사과를 주는 게 고백이라면 고백일까. 질투하는 친구 은숙이 있지만 영화에는 파국이나 복수가 있는 게 아니라, 은숙이 혜원에게 정정당당 겨루자고 악수를 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동안 나는 어떤 영화에 길들여진 걸까. 영화를 보기 전에는 솔직히 ‘심심하니… 재미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좋다. 사람들의 평이 좋은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싶기도 하다.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영화다. 깊은 밤 멧돼지와 고라니 소리 때문에 겁이 난 혜원에게 재하가 두고 간 강아지가 위안이 되는 것처럼.


  혜원이 요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음식은 모두 정성과 시간을 들일수록 맛있어진다. 곶감, 오코노미야키, 양파구이, 감자빵, 막걸리, 떡볶이, 수제비, 된장찌개, 오래 익은 인삼주, 크렘블레……. 모두 혜원이 엄마에게서 배운 요리들이다. 동시에 혜원의 방식대로 요리법을 조금씩 바꾼 것. 그리고 재하는 그 ‘맛’이 어떻다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줄 줄 아는 친구다. 영화는 사람도 그렇게 시간을 들여 익어간다고 말해주는 듯 하다.  


  계절은 변하고 농작물이 자라고 열매가 맺힌다. 밤송이가 떨어진다. 그리고 혜원은 ‘가을 숲엔 곰이 나온다’는 말을 떠올린다. 가을에는 먹을 것이 많으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해가 짧아지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그런 말이 있는 걸까? 혜원은 손이 많이 가는 밤조림을 만들고 유리병에 재워둔 후 하나씩 아껴서 먹는다.


  엄마가 없는 시골집을 떠나서 서울에서 알바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혜원. 똑같이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남자친구는 붙었고 혜원은 떨어졌다. 공부하는 동안 남자친구의 도시락은 정성스레 싸주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서서 먹는 노량진 컵밥과 편의점 폐기 도시락을 주었다. 허기. 혜원은 맛있고 좋은 음식이 고프고 마음도 고프다. 얕은 강, 징검다리 위에 앉아서 친구들과 즐겁게 술을 마신 후 ‘임용시험에 붙은 걸 축하한다고, 시골집으로 떠나온 게 아니라 돌아온 거라고’ 남자친구와 전화통화를 한다. 아마도 마지막 통화일 것이다. 쓰다 보니 넓고 편한 풀밭을 다 두고 왜 징검다리 위에 앉아 술을 마셨는지 궁금해진다. 그건 혜원과 은숙, 재하가 강을 건너는 중이라서 그럴 거다. 영화는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강을 건너다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쉬어갈 수도 있다고. 돌다리라서 다행이다. 이야기하는 동안 우지끈 부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혜원은 아주 집으로 돌아왔다. 자연으로 돌아왔다.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으로. 자신을 시골집에 ‘아주심기’하기 전에 식당에서 음식 서빙 알바를 한다. 문득 혜원의 엄마(문소리)는 혜원을 떠나 아마도 요리하는 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엄마가 오코노미야키, 크렘블레를 해주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는 요리를 배운 사람, 계속 요리를 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혜원에게 보낸 편지에도 감자빵 만드는 레시피를 적었던 거고.

  

  시골을 떠나 서울살이에 지친 혜원이 시골로 돌아온 것처럼 혜원의 곁을 떠났던 엄마도 혜원의 곁으로 돌아왔을까. 정말 엄마가 돌아왔을까? 시간이 흘러 하얀 개 오구가 저만큼 자란 것처럼. 오구는 낯선 사람이 집에 와있다는 듯이 짖고 저 열린 문, 젖혀진 커튼 사이를 들여다보면서 혜원은 웃는다. 이게 마지막 장면이다.


  자, 다시 첫 장면으로 가보고 싶다. 혜원이 처음에 열쇠로 문을 열고 문턱에 걸터앉아 거실에 눕는데 그렇게 편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단정하게 정리가 돼 있는 고요하고 편안한 집… 재하에게는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편한, 하늘에 달려있는 농사가 집이다. 은숙은 이 시골이 집이 되어 답답하지만 노래방에서 탬버린으로 상사 머리를 후려칠 만큼 강단이 있으니까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때마침 그 상사는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은숙이에게 별 탈은 없었다고? 이건 판타지인 것 같다. 은숙 캐릭터가 좀 더 살아나지 못한 게 아쉽다.     


  그런데 쓰다 보니 집을 떠난 ‘엄마’를 ‘회복해야 하는 무엇’으로 그린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혜원은 이미 혼자서도 잘 해내고 있으니까 그걸로  꽉 찬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물론 엄마에게도 돌아올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영화는 혜원을 중심으로 흐르고 엄마는 시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은 '혜원의 회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모성과 자연의 품이 겹쳐 보이는 이야기는 이제 내게 식상한 모양이다. ‘엄마’라는 이름에도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 즈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가지 앉아 있으면 ‘동물과 식물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볼 수 있다.


  영화가 끝나자 장을 봐서 정성스레 저녁을 지어 먹어야 할 것 같았지만 아쉬운 대로 친구와 ‘시골집’이라 이름 붙은 식당을 찾아가 시골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었다. 계란 후라이도 나왔다.


                                                                                                      

                                                                                                            2018년 3월 2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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