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파리에 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작년 이맘때쯤 남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했던 것이 기억났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정열의 스페인을 가고 싶어 했고, 나는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낭만의 도시, 파리를 품은 프랑스에 가고 싶어 했다.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 끝내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결정을 미루었었는데, 결국 코로나 덕에 올해 여행은 스페인이든 프랑스든 다 물 건너갔다. 2020년 연말을 집안에서 리모컨과 함께 보내게 된 우리는 넷플릭스를 켜고 작년에 미루었던 결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 스페인의 스릴러 영화인 <나의 집으로>를 선택했고, 나는 파리가 배경인 미국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선택했다. 우리는 가위 바위 보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고, 승자는? 파리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어느샌가 로망이 생겨버린 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남편은 나를 이길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은 언제나 가위 바위 보를 하면 가위부터 내고 보는 나의 이상한 습관을 모를 리 없으니깐. 그는 넷플릭스로나마 내가 파리에 대한 로망을 풀 수 있도록 기분 좋게 리모컨을 양보했던 것이다.
드라마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무작정 파리가 들어간 제목만 보고 선택한 드라마였지만, 대런 스타가 제작자인 것을 보니 <섹스 앤 더 시티>와 결을 같이 하는 드라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에밀리의 일과 사랑, 그리고 여자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 예상하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첫 시작은 드라마틱했다. 파리의 마케팅 회사에서 1년간 일하기로 했던 상사가 덜컥 임신하게 되면서, 우연히 그 기회를 대신 잡게 된 에밀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행복에 겨운 에밀리의 표정과는 달리, 남자 친구는 떨떠름한 표정을 한다. 둘의 상반된 표정이 보여주듯, 그녀의 기회는 누군가에겐 이별의 구실이 되기도 한다.
낭만적인 도시 파리에서 1년간 지낼 수 있다면? 일을 사랑하는 에밀리라면 당연히 Yes.
덤으로 얻게 되는 특별 보너스에, 1년 후 시카고로 다시 돌아왔을 땐 승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남자 친구와의 장거리 연애쯤이야 완벽하게 짜인 스케줄표 하나면 된다.
그녀는 설렘을 안고 시카고에서 파리로 향한다. 하지만 갑자기 얻게 된 황금 같은 기회였으니, 에밀리가 파리 생활에 대한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그녀가 할 수 있는 프랑스어는? 고작 해야 bonjour와 merci 뿐이었으니,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프랑스인들과의 생활이 험난할 것이라는 것은 예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첫날부터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은 아름다운 풍광 속 낭만을 품은 파리에 대한 환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먼 거리만큼이나 그 문화적, 언어적 장벽 또한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출근 첫날, 마케팅이라면 자신 있었던 그녀는 같이 일하게 된 동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영어를 못했던 직원은 그녀를 대놓고 피했고,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려던 그녀에게 돌아온 말은 "왜 그렇게 소리 지르세요?"였다. 그리고 만난 회사 대표는 시카고 출신인 그녀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시카고 피자에 대해 역겹다는 표현을 한다. 모두가 이방인인 에밀리에게 무례하고 불친절하다.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에밀리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느낄 때쯤, 매력적인 도시 파리는 그녀를 다시 붙잡는다. 매일매일이 좌충우돌의 연속이지만 프랑스인들은 모두 불친절하다고 사이다같이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중국인 민디, 아무 대가 없이 친절을 베풀어준 카미유 그리고 무엇보다 아래층에 사는 매력적인 셰프 가브리엘까지. 눈을 즐겁게 하는 파리의 핫스폿과 함께 우연처럼 다가온 좋은 사람들은 그녀가 파리에 계속 머물 구실이 되었다.
에밀리는 동료로부터 촌뜨기라는 놀림을 받지만 전혀 굴하지 않는다. 패션의 본고장인 파리에서도 자신만의 개성 강한 패션을 보여주고, SNS를 창조한 미국인답게 트렌디한 감성으로 젊은 감각의 마케팅 능력을 선보인다. 에밀리가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때론 안타깝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도 척척해내니 그녀를 통해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매회 20분 남짓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에피소드마다 막장과 판타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부분이 다음 화를 기다릴 수 없게 만드는 짜릿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 덕에 나는 앉은자리에서 시즌 1의 모든 에피소드(10화)를 쉬지 않고 다 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프랑스의 문화는 미국인의 시선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 줄 수도 있다. 프랑스인들은 모두 불친절하고, 콧대가 높으며, 불륜도 일상인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그 한 끗 차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지 않은가?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프랑스인들이 모두 에밀리를 위해 영어로 대화를 하고, 은근슬쩍 그녀를 챙겨주기도 하니, 미국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제삼자인 한국인의 입장에선 프랑스인들은 츤데레다.
You live to work. We work to live.
당신들은 일하기 위해 살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합니다.
인생을 즐기는 워라벨의 삶을 사는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성과 중심의 일에 매몰된 미국인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드라마 속 뤼크의 대사처럼, 프랑스인과 미국인은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낯선 문화 속에서 새로운 멋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며 로맨틱한 파리의 풍경과 에밀리의 화려한 패션으로 눈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뉴스만 틀면 기세를 꺾지 않고 퍼지는 코로나 소식에 절망적인 자영업자들의 눈물까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일뿐이라 현실은 전쟁터 같기만 하다. 이런 모든 걸 잊고 아무 생각 없이 반짝이는 삶을 엿볼 수 있었으니, 이만한 아이캔디가 또 어디 있으랴!
20대의 에밀리가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사랑까지 하는 걸 보면서, 30대인 나는 잠시나마 그때의 나를 회상해 보았다. 현재의 에밀리는 그때 우리 모두의 드림걸이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