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옛 직장 동료를 만났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웬만하면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편이라 정말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니면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퇴사하고 하는 것 없이 빈둥빈둥 놀고만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런 영양가도 없는 나를 보고 싶다는 조금은 닭살 돋는 말까지 서슴지 않으며 당장 만나자고 나를 보채는 것이 아닌가! 평소 연락도 없던 이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만나자는 것을 보니 꽤나 위로가 필요한가 보다 생각했다. 자꾸 거절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싶어 만나자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나를 보자마자 "과장님! 잘 지내셨어요?" 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과장이란 타이틀을 마지막으로 회사에 이별을 고했으니, 10개월 남짓 지난 지금도 그 직함은 그대로 남아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높은 직급까지 따 놓고 그만둘걸... 하는 생각이 드니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 직급에 욕심을 부리는 나 자신이 어이없어 피식 헛웃음이 지어졌던 것이다.
백수가 하루하루 밥 굶지 않고 여유로운 시간을 책만 읽으며 향유하고 있으니,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나는 아주 복이 넘쳐난다라고 했더니 그녀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속으로는 세상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부러울 게 없어 백수를 부러워해? 라며 일갈을 가했지만, 나는 흐릿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차분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지금 그녀가 당장이라도 퇴사하고 싶을 만큼 회사 다니는 게 무척이나 고달프고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두고 싶지만 다달이 빠져나가는 카드값에 사표는 제 마음속에 품고만 있다는 그녀는 내게 조언을 얻고 싶다고 했다.
"과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질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답은 알고 있지만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고민을 잘 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는 좀처럼 회사 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유는 자신만 돋보이려는 나쁜 상사들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대가는커녕 그녀는 항상 상사들에 치여 공은 가로채이고 과만 떠맡아 일 못하는 직원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런 야박한 회사 그만두고 능력을 인정해주는 좀 더 나은 회사를 찾아가면 좋을 텐데 그녀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지금 다니는 회사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고 은연중에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 당장 그만두라는 말 대신, 그녀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내가 공감해 주고, 그녀가 아주 잘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지금 회사엔 그녀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 라는 말을 듣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인정 욕구에 대한 충족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주섬주섬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월요병도 산재 처리해주세요>라는 책인데 브런치 작가인 마음달님이 쓴 책이다. 그러자 그녀가 한쪽 눈썹을 찡긋 추켜올렸다. 뜬금없이 책을 내미니 당황했을 것이다.
"갑자기 웬 책이에요?"
"한 번 읽어 보라고."
"에이, 과장님! 저는 책 읽는 거 싫어해요."
"그래? 이거 완전 읽기 편한데... 가볍고 짧아서 금방 훅 읽혀."
"에세이 읽어봤자 다 그런 저런 얘기 똑같은 말만 하던데......"
"그래?"
"네. 그래서 재미없더라고요."
나는 웃으며 그 책을 그녀에게 떠밀듯이 주었다.
"그래도 선물이니 한번 읽어봐."
그녀는 선물이란 말에 할 수 없이 그 책을 받아 들었다. 한 번 훑어보는 척하더니 이내 책을 내려놓았다. 나는 조용히 그 책을 펴서 목차 부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월요병도 산재 처리해주세요> - 안정현(마음달) 지음
'일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저 사람만 아니라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 싫은 소리를 하기가 힘들어요....../ 미친 듯이 일하고 집에 오면 누워만 있어요......'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 해봤을 이야기들.. 목차를 보더니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런 저런 다 똑같은 얘기, 읽어도 읽어도 매번 다들 똑같은 고민만 하잖아. 봐봐. 누구나 다 똑같아. 내가 겪는 일들, 다른 사람들도 다 겪고 있더라."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들... 가끔은 백 마디의 그럴싸한 말보다 남들도 다 똑같구나라는 사실이 안도의 한숨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심리상담가래. 대리 상담한다 생각하고 읽어봐. 나 같은 프로 퇴사러 얘기야 다 거기서 거기지. 중요한 건 퇴사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진 않는다는 거야."
"회사 옮겨도 똑같겠죠?"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잖아. 내가 6번이나 사표를 내보고 나니 드는 생각은 그래. 내 마음 돌볼 줄 모르면 어딜 가도 다 똑같다는 거."
나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정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랐다.
책을 싫어한다던 그녀는 내가 준 그 책을 꼭 안고 집으로 갔다. 다음에 또 봐요!라는 말과 함께.. 나는 속으로 다시는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음에 또 보자고 한다면, 똑같은 고민을 풀어놓을 게 분명하다. 부디 이 책을 읽고 진정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