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전에 미리 사놓았던 임신테스트기로 임신 여부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남편은 몰랐으면 했다. 확실치 않은 것에 기대를 거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음성, 비임신.
임신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또다시 불확실한 결과를 기대하며 한 달을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질렀다. 시간과 확률과의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의 20대는 결혼에 대한 판타지나 희망 대신 앞으로 내가 살아갈 더 큰 세상에 대한 열망과 인생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들로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찬란했던 나의 20대는 쏜살같이 지나 30대라는 좀 더 무거운 숫자로 바뀌었고, 나는 내 인생의 제2막이 열릴 거라 기대했었다.
여자의 성공은 30대에 주로 이루어지지 않던가? 조앤 K. 롤링도 버지니아 울프도 그 유명한 마사 스튜어트나 코코 샤넬도 30대에 자신의 진짜 인생을 찾았다. 그러니 나도 30대에 성공의 맛을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기대는 결혼과 함께 조금씩 희석되어 갔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직장 동료들이 임신을 하며 자연스럽게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고, 나도 의례 자연스럽게 임신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해외 업무를 했던 나는 잦은 출장으로 임신을 하면 바로 업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고, 더 늦기 전에 나도 한 번쯤은 성공이란 걸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두꺼운 벽은 내게만 예외가 아니었다.
만년 과장에서 멈추어 버린 나의 성공 시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아주 늦은 나이가 돼서야, 이젠 그만하자라며 나를 타일렀다. 나는 회사의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구조를 핑계로 직장인의 삶과 영원한 작별을 했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단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그다음에 한 선택은 임신 준비였다. 그렇게 시작된 임신 준비는 처음부터 내 고개를 한없이 아래로 떨구게 만들었다. 30대 후반인 나는 병원에서 산전 검사를 받기도 전에 임신하기 어려운 난임 여성이란 꼬리표를 먼저 얻었다. 여자의 나이가 많으면 임신하는데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임신부는 질병, 임신 합병증, 염색체 이상, 유산율, 조산 등이 높아진다고 하니 의학적으로 나는 고위험 임신부로 분류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떠들썩한 이때,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로 삶이 풍요로워진 이때에 왜 유독 임신만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일까? 만혼이 흔한 요즘 시대에 나와 같은 동지들은 위험을 안고 임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임신을 계획하며 갖가지 검사를 받고 처음 받은 배란일에 의사의 권유대로 준비를 했다. 계획된 임신 준비는 처음이었으므로 나와 남편은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덜컥 임신을 하고 말았다. 얼떨떨했다. 임심이 이렇게 쉬운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며, 왜 진작에 시도하지 않았을까? 라며 후회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 것인지, 아들일까? 딸일까?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날 하루를 희희낙락하며 보냈다. 다음 날, 나는 병원에서 초음파로 아기집이 예쁘게 자리 잡은 것을 확인했고, 산모수첩도 받았다.
나는 이젠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몸조리만 잘하면 되겠지 했다. 카페인이 그득한 커피 한 잔으로 매일 하루를 시작했던 나는 그 좋아하던 커피도 바로 끊고, 임산부에게 좋지 않은 음식이나 행동은 자제하며 다음 병원 검진을 차분히 기다렸다.
다음 병원 검진을 하루 앞둔 날, 나는 갑자기 하혈을 했다. 남편이 급하게 월차를 내고 바로 병원에 함께 갔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아기집이 스르륵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의사는 한동안 말을 아끼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산입니다. 산모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마세요. 이번에 임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내 눈은 쳐다보지도 못하던 의사는 나만큼 이 순간이 힘들어 보였다. 옆에 앉아있던 남편을 슬쩍 쳐다보니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모두가 슬퍼하는 가운데, 나는 맘 놓고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얼른 몸을 추슬러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꽉 채웠다. 더는 늦출 수가 없는 나는 병원에서 규정지은 나이가 많은 난임 여성이 아닌가!
유산 후 자궁 상태를 확인하러 간 날, 나는 달라진 검진비에 적잖이 당황했다. 자부담금이 12,412원이던 초음파 진단료가 유산 후엔 31,704원이었다. 임산부가 아니라서 받은 차별이란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쓰렸다.
이후 몇 번의 시도를 더 해봤지만, 원하던 임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우울한 날들이 지속되었다. 여자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해 임신은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서 저만치 내팽개쳐놓고 살았던 나는 난임이라는 현실에 좌절만 했다. 임신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해 죄책감까지 들었다.
기다림이 하루하루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 정신은 피폐해져 가기만 했다. 난임이란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기 위해 견뎌야 할 희생에 나는 과연 담담할 수 있을까? 이 상태로 만약 아이를 갖는 다면, 과연 나는 세상이 원하는 아름다운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처한 현실은 나를 한없이 작고 아프게만 만든다.
공원에 산책하러 갔다가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되었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갖는 것인가? 문제가 많다. 애를 낳아야 나라가 부강해지는데 도대체 애는 왜 안 낳는 것인가? 정신이 썩었어. 배가 불러서 그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분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나도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임신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