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고 나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단어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다. 이. 어. 트!!!!!!
폭탄인 다이너마이트와 2글자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발음마저도 귀에 거슬리는 그 단어.
다이어트는 매번 듣기만 해도 짜증이 먼저 솟구친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편식이 심해서 입이 짧은 편이었고 한 번도 살이 쪄서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제발 더 먹으라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그만 좀 먹으란 소린 들어 본 기억이 없는 내게 다이어트는 어느새 평생 숙제가 되고 말았다.
20대의 마지막 날, 나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서른 즈음에> 중
지금은 가소롭기만 한, 조금 더 젊었던 날의 나의 감성.......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 보면 손. 발이 오그라들지만, 나는 그날 꽤 진지했다. 찬란했던 나의 봄이 꽃잎을 떨어뜨리고 한없이 흐릿해져만 가는 것 같았던 그때, 나는 자꾸 멀어져 가는 청춘을 붙잡을 수가 없어 떠나간 시간들을 아쉬워하며 공허함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미친 듯이 공허함을 채우기라도 하듯, 그날 이후 나의 식욕은 이상하리만큼 왕성해졌다. 못 먹던 김치와 된장찌개가 입에 딱 맞기 시작했고, 냄새 때문에 꺼렸던 돼지고기와 곱창의 향이 향긋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나도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어서인지 입맛도 나이에 맞게 구수해졌다.
삶의 많은 것이 변해버린 30대의 시작은 그렇게 입맛의 변화와 함께 성큼 찾아왔다. 그쯤에서 끝났다면 해피엔딩이었을 텐데 눈치 없이 나잇살까지 꾸깃꾸깃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내 키의 평균 몸무게보다 약간 낮은 숫자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4살이나 어린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의 이상형은 고준희였다. 마르고 키가 큰 모델형! 나와는 영 다른 이미지의 여성.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남편과 연애 시절, 같이 옷을 고르러 갔을 때였다. 그가 추천해준 옷은 한눈에 봐도 내 몸을 접어야만 넣을 수 있는 천조가리였는데 고준희가 어느 화보에서 입었던 옷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작은 키는 유전이라 고칠 수 없지만 호리호리한 몸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작 2~3킬로만 더 빼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다이어트는 지금까지 끝을 맺지 못하고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나의 다이어트 역사에 오점을 남긴 기간은 바로 필리핀 세부에서의 주재원 생활 때였다.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불었는데 약 1년 후 한국에 와서 확인해 보니 10킬로그램이나 불어 있었다. 문제는 30대 중반이 되어 찐 그 살과는 아직도 동거 중이라는 것!
절교하고 싶어도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붙어있는 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잘 빠지지 않았다. 최근엔 임신을 준비하면서 2번의 유산을 겪은 후,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약까지 먹었더니 살은 오히려 더 찌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다이어트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오기나 하는 걸까!?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내 삶은 약간 피폐해졌다. 살이 더 찔까 봐 두려워하며 먹고 싶은 음식은 양껏 먹지도 못하고 옷을 사러 가서도 자꾸 주저하게 된다. 몸에 딱 맞는 예쁜 옷은 이제 부담스럽다. 살을 푸근하게 보듬어주는 오버사이즈의 편한 옷만 찾게 되니 내 스타일이란 것이 실종된 지 오래다.
옷장을 정리하기 위해 버릴 옷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외출복을 자주 입지 않았던 나는 버릴 옷을 가려내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예쁜 원피스 하나를 집어 입어볼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두 다리를 원피스 안에 넣고 두 팔을 소매에 걸쳤다. 그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 과정은 잠기지 않는 지퍼 때문에 결국 멈추고 말았다.
그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알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불어난 살만큼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살이 찐 모습이 아니라 살이 찐 그 모습을 싫어하는 내 자아가 싫었다. 순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한번뿐인 내 인생인데 다이어트한다고 나는 먹고 싶은 거 양껏 먹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거 맘껏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때마침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왔다. 나는 그를 안으며 질문 하나를 던졌다.
"여보, 나 어때? 별로야? 못생겼어? 고준희처럼 마르지 않아서 싫어?"
그러자 남편은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니. 예뻐.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나는 그 자리에서 다이어트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도록 다. 이. 어. 트 네 글자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러자 나는 지난 몇 년간 나를 속박하고 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얘기했다.
"예뻐, 아~~~ 주 예뻐."
나는 입을 헤벌리고 웃으며, "쳇. 별거 아니구먼. 이 세상에서 내 남편만 나를 예쁘다고 하면 됐지 뭐....." 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먹어봤자 고작 살만 조금 찔 뿐, 내 인생 절대 끝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