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정치 혐오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우리나라의 정치가 필히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아는 정치란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인데 매일 아침 뉴스를 보면 어느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었다는 기사보다는 여. 야 서로 싸우는 내용을 더 자주 보게 되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번 여. 야 대선 경선만 보더라도 국민을 위한 정책과 비전은 실종된 채, 고발 사주와 대장동 의혹만 남아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대선 후보들에게 제기된 여러 의혹들도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윤석열 후보의 '전두환 옹호' 발언과 '개 사과' 논란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해서가 아니다. 조심스럽지만 80년대에 태어나 그 시대의 실상을 듣고 자란 이로써 나름 할 말이 많아서다.
윤석열 후보가 지난 17일 국립 5.18 민주 묘지에 참배했을 당시, '민주항쟁 구속자회'관계자를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희생자들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고통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드릴 말씀이 없다."라고 말이다.
뉴스에 도배되었던 국립 5.18 민주 묘지에서 오열하는 듯한 윤석열 후보의 모습은 진정 가슴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을까!?
그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열 후보는 부산 당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전두환 옹호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부분이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다. 그거는 호남 분들도 그런 얘기를 한다."
이 발언 이후 논란이 계속되자 윤석열 후보는 SNS에 "전두환 정권에 고통을 당하신 분들께 송구하다"라고 사과를 했으나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엔 "유감을 표한다"라고 했다가 "할 말한 말이라 생각"한다고 말을 바꾸고, 심지어는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까지 올려 사과를 희화화한 듯한 메시지로 또다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민감정과 부합되지 않았던 그 발언은 분명 진정한 사과 한 마디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논란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개 사과 논란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윤석열 후보는 이미 사과의 말씀을 드렸다며 즉답을 피하고 있다. 여전히 그 사과는 끝나지 않았다.
이런 논란이 한창이던 때에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 3가 때마침 방송되었다. 그 첫 화의 주제는 <형제복지원 사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던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불린다. 이 사건은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인 선도를 이유로 수 천명의 미성년자와 일반인, 심지어 노인들까지 불법 감금하여 강제 노역, 구타, 성폭행, 암매장 등을 강행한 사건이다.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회에서는 형제복지원에 감금됐었던 정연웅 씨와 이혜율 씨가 출연해 그날의 사건에 대해 생생히 증언했다.
정연웅 씨는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기 전 12살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던 아주 성실했던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경찰에 의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 4년 7개월 간 갇혀 있었는데 그의 사연이 더욱 안타까웠던 건, 아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고통으로 술에 빠져 살던 아버지마저 지옥 같았던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두 부자는 형제복지원에서 풀려나서도 아버지가 아들과 살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만 하다가 돌아가시면서 영영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혜율 씨는 남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찾기 위해 대전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가 깜빡 잠이 들어 종점인 부산역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집을 찾아주겠다는 경찰을 따라갔다가 형제복지원에 갇히게 되었다는데 그 당시 이혜율 씨는 7살, 동생은 5살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수용시설로 길거리 등에서 발견된 무연고자뿐만 아니라 장애인, 고아, 그리고 정연웅 씨와 이혜율 씨처럼 가족이 있던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로 끌려갔던 곳이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형제복지원의 모습은 산비탈에 위치해 있고 5~6m나 되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나가기도 들어가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형제복지원은 표면적으로는 부랑인을 수용해서 개과천선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폭행을 일삼아 장롱, 신발, 장난감, 자물쇠 등 온갖 상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운영되었고, 잡혀왔던 모든 사람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실제 그곳에서 생활했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매일 밤마다 구타와 성폭행이 자행되어 그곳은 울음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었다고 한다.
다행히 1986년 김용원 검사에 의해 형제복지원 사건은 수사에 들어가지만, 군사 독재 정권의 유지를 위해 이 사건을 무마하려던 여러 세력들로 사건은 흐지부지 해졌고, 복지원을 운영했던 박 원장은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되어 겨우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는데 그쳤다.
박 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씨는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바로 1981년에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외국인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내려지면 서다. 외국인에게 보이기 창피한 부랑인의 구걸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일명 '인간 청소'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가족이 있는 어린아이들까지 무자비로 잡아들였다.
그 당시 형제복지원 측에서 내세웠던 부랑인의 기준은 기차역 혹은 버스터미널에서 tv를 본 적이 있는 사람, 술에 취해 집이나 거리에서 주정을 부린 적이 있는 사람, 수염이 덥수룩한 채 다닌 적 있는 사람 등으로 어이없는 기준들이었다.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던 박 원장은 당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부랑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당시 징역 2년 6개월 만을 선고받고 출소했던 박 원장은 또 다른 사업을 통해 부자가 되어 2016년 8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당시 형제복지원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을 자행한 주범은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다. 아직도 피해자들은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국가는 아무리 부랑자라 하여도 정당한 법에 의하지 않고 사람을 가두는 등으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제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복지원 같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군사 독재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어떤 좋은 점이 있었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전두환 씨가 정치를 잘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인권을 침해당하면서도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전두환 씨가 군대 시절 익숙했던 상명하복으로 모든 어두운 부분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군사 독재 정권이 제대로 역사의 평가를 받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피해자들의 진상 규명에 모든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야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