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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학 때 갔던 그 길을 가다

덤덤히

by 권영은

학교에서 이대까지 걸어 걸어서 도착하면 역시 멋쟁이들의 성지라 할만한 옷 가게들,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유명한 떡볶이, 이대생이 된 고등학교 동창이 치즈케이크가 맛있다며 데려간 스타벅스, 벼르고 벼르고 산 세라 구두집, 몇 달에 한 번 꼭 들리던 스티일 담당 미용실, 활기찬 거리 뒷편 차분한 스터디하기 좋은 카페, 골목길 숨은 가죽 가게, 그 안에도 혼자 멋지게 살던 비혼주의자의 집, 애정 깊었던 영어카페(사장님 이름이 불현듯 떠오름) 한 달에 한 번 무료로 볼 수 있었던 영화관(sk telecome이던가... T?)에서 본 <봄날은 간다>


데이트했던 이들과 친구들과 아직도 있는 그때 산 소품과 추억이 방울방울 한데


벌써 20년 전이라니!

서울국제영화제에 <무색무취> 상영 후 GV를 하기 위해 근 10년 만에 이대역을 찾았다. 인도에서 온 LG 스티렌 가스누출 사고 대응 활동가 사이를 일찌감히 만나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카페라테를 마신 뒤 메가박스 신촌에 다다랐다. 초대권을 받아 들고 익숙한 동지들을 만나 영화를 봤다.


내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고, 우리 사무실이 크게 비치고 해외 활동가와 함께 가 본 지역이 나온다. 내가 말한 이야기도 덤덤히 들리고... 영화가 끝나고 사회자가 게스트를 모시겠습니다! 하자


무대 앞으로!

관객들 중 반올림의 활동에 연대해온 이도 있고, 젠더 이슈에 관심이 있고, 반도체 관련 업종으로 걱정이고, 반올림 후원이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고, 30분 간 이어진 따뜻한 연대의 자리가 끝이 났다. 서로를 챙기며 비건 떡볶이집으로 향한 길. 그 시절 옷 가게였었고 누군가와 거닐었었고, 싱숭생숭하기도 들뜨기도 했던 그 길이었다.

온라인 회의차 들린 스타벅스 1호점 벽엔 그 시절 사진이 역사처럼 박혀있었다. 그때의 스터디룸에선 프리마켓을 해 아이 키링 하나 추억의 물건인양 사서 오는데,

그때의 내가 바랐던 오늘의

나인가? 아주 잠깐 생각이 스쳤을까.

덤덤히 전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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