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넘기며
집으로 왔다. 마을버스에서 합정역에 내렸을 때 1초 고민했다. 걸어서 선유도로 갈지 말지. 하얀 구름과 복숭아빛 하늘 사이를 보며 한강을 걷는 건 생각만 해도 설렜다. 오랜만에. 그런데 그걸로 충분했다. 다리에 가려진 복숭아빛이라도. 한강이 짠하게 펼쳐지는 걸 못 보고 한강 바람 오랜만에 만끽 못 할지라도.
이미 3시간 가까운 회의에 배가 고파 간식으로 산 식빵을 살금살금 뜯어먹는 중이었다. 15년 전 옛 남자 친구와 먹었던 라멘집이 여전해도 상관없다 싶었다. 웨딩
촬영한 선유도 추억이 흐릿해도 상관없었다. 마을버스로 지나치듯 본 힙해 보이는 카페와 식당들이 내겐 멀어 보였다. 한 시간 반 걸리는 집이 되레 가깝게 느껴졌다.
기후정의행진 관련 회의를 마쳤다. 9.27에 몇 만 명이 모여 기후정의행진을 할 텐데, 평등과 공공성에 방점을 찍을 작정이었다. 참석자들은 처음 본 이도 있을 텐데 다들 익숙하다. 윤석열퇴진을 외친 광장에서 한몫씩 해낸 이들이다. 아니 이들이 모여 회의할 땐 조용히 노래도 불렀다 늘어졌다 가만가만하다 의견이 뒤집혔다 고민하는데 큰 요동이 없다.
그러다 가방도 주섬주검 싼다. 회의 주제해놓고 당근 갈 시간이 다 되어서란다. 마이크를 잡으면 몇 만 명 앞에서 쩌렁 발언도 하던 이들이 회의에서는 에너지를 적게 쓴다. 쉬는 시간도 없이 조용히 물도 마시고 간식도 꺼내먹다 저녁시간이 다 돼 끝나도 밥 먹자 하는 이 없다. 여긴 핫 플레이스 망원과 합정 사이임에도!
활동가가 되어 내가 내향인들지 외향형인지 헷갈렸었다. 군중 앞에 서도 떨리지 않고, 수 백 수천 규모의 집회를 예상하며 집회를 준비를 거뜬히 하는 건 외향형 아닌가. 그런데 옆사람에게 스몰토크도 끝나고 저녁도 권하지 않는다. 나의 자유시간과 사생활이 중요하다. 에어팟 끼고 같은 버스 올라 따로 집으로 간다. 광장에서는 대중에게 기후정의를 외치겠지. 공공성과 평등을 말할 거다.
후원마련을 위한 굿즈를 조용히 하나 사서저녁노을이 진 지 한참만에 집에 도착했다. 가만히 맥주 한 캔 따고 바지런히 핸드폰에
자판을 눌렀다. 다음 회의 일정, 내일 토론회 국회의원 간담회 준비, 모레 기지회견 준비 등 누운 자세와 달리 열정적이다. 그리고 사잔도 올리며 다른 단체 후원굿즈도 홍보한다.
잠시 껍데기 안에 숨을 때처럼 쉬겠다며
이 글을 썼는데!
대만 활동가가 연락해 왔다. 곧 있을 9월 필리핀 워크숍에 그 모자 사 와줄 수 있냐고!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