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비는 나에게서 시작된다

내면 아이를 치유하는 연습

by 따뜻한 불꽃 소예

박재연 소장의 강의를 듣다 머리가 띵해지는 문장을 마주했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전함'의 감각이 중요하다."


돌이켜보니, 나는 늘 누군가가 나의 경계를 침범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건 내가 어린 시절, 존중받고 보호받지 못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나는 결혼 후 원치 않게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고, 그분은 전통적인 가치관 아래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자주 나의 경계를 넘으셨다. 나는 그 모든 행동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여전히 그 경계는 가끔 흔들린다.


한때 나는 그런 나를 원망했다.

아마도 외부의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케는 개인주의적이야."

그건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다. 나는 그 말들을 내면화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 역시 자신들의 경계를 침범당했을 때 나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외부의 평가는 발언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일 뿐,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그 말들을 그대로 흡수하며 상처받았다.


나는 자비롭지 않았다. 특히 나 자신에게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어쩌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주문이 될 수 있다.

불교 공부를 하며 업(業)과 인욕(忍辱)의 개념을 접했지만, 이제 나는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기로 했다.


자비는 먼저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브레네 브라운이 말했듯,

'우리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용감한 일이다.'

나는 내 상처와 이야기를 끌어안으며,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들기로 했다.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는, 참는 대신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속으로 곪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안다.

어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참는 것은 강자의 영역이다. 자기 자신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약자가 누구를 참아준단 말이냐."


이제 나는 내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에겐 가감 없이 결계를 치고, 나만의 안전기지를 지키기로 했다.

나에게 좀 더 자비롭게, 따뜻하게 말 걸고, 다독이고, 보듬어주기로 했다.


앞으로 매일 저녁, 어린 소예에게 속삭일 것이다.

'넌 안전해, 넌 충분해.'

그 말로 하루를 다독일 것이다.


수고했어. 소예.

너보다 더 멋지게 살 수는 없었을 거야.

넌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이제 내가 널 지켜줄게. 넌 안전해.

고맙다. 소예야. 잘 살아줘서. 넌 참으로 멋지고, 장하다.


나는 마땅히 보호받고, 존중받으며, 사랑받는 사람이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 성장하며, 나를 위한 지혜로운 선택을 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용서하고, 이제는 더 이상 '부족함', '안전하지 않다'라는 서사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믿음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삶에서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이제 사랑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I am willing to release the need to be unworthy. I am worthy of the very best in life, and I now lovingly allow myself to accept it.)

by 루이즈 헤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부모와 자식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