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온기의 자리

타인의 서사에서 빠져나오기

by 따뜻한 불꽃 소예

한 번도 세상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걸까.
그녀의 감정 회로는 오래전부터 누전기처럼 차단되어 있었다. 고통을 흡수할 틈도, 여유의 공간도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냉담함이 용납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본능’뿐이었다.

이 혼란스럽고 차가운 세상에서,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질서. 건강. 그리고 난각번호 4번의 계란.


소화조차 잘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편의 잿빛 얼굴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늘 복잡해진다.

관찰자 모드로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분리해 보려 애써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처럼 어느 순간 심장이 들끓는다. 밥을 먹다 토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며 심장은 오히려 타들어간다.


그런 남편이, 그럼에도 그녀에게 찰보리빵을 보내며 전화를 걸었다.
점점 시들어가는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온기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되돌려준 말은 남편의 몸 상태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그 유기농 계란 어디서 사니? 전화번호 좀 알려줘”였다. 분명 그전 주에 내가 그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는데도, 그녀는 태연히 ‘유기농 정보’만 궁금했다.

마지못해 전화를 끊은 남편은 결국 계란을 그녀의 집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다시 울린 전화.
돌아온 말은 단 한 문장.

“난각번호가 1번이 아니라 4번이더라.”

뚜뚜뚜—.


그렇게 그는 또 한 번, 그녀에게 실망을 배웠다.

난 그저 남편에게 미워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줬다. 어머니가 이상하신 거라고 말이다.

어쩌면 남편은 어린 시절 따뜻한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임감과 의무감만 짊어진 채 자라왔을지도, 불안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기심을 키운다고 한다. 그 장막이 그녀의 마음을 오래 가려, 아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그들 사이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남편의 마음에 자리한 고드름이 천천히 녹아내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더는 타인의 서사에 내 감정을 맡기지 않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족의 서사, 그 문장들 속에서 내가 감정의 주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차가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찰나의 온기를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찰보리빵을 보낸 것처럼. 누구에게는 그 빵 한 조각이, 잃어버린 온기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애씀일 수도 있으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비는 나에게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