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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Sep 10. 2017

말하기를 포기한 순간

경쟁하는 것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과 만났다. 새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정수리 위를 달구길래 피해 들어간 곳에서 시원한 맥주와 피자를 주문했다. 동전 냄새가 나는 금속 테이블 위로 필리핀 세부 여행을 마치고 온 L이 기념품을 쏟아냈다. S는 이번 달에 생일을 맞은 이들을 위해 티라미슈 케이크를 가져왔다. 뒤늦게 O가 치과 치료를 마치고 합류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테라스 너머 남산타워가 보이는 자리였다. 


우리는 스무 살 때 처음 만났다. 막 십의 자리 숫자가 1에서 2로 바뀔 때, 어떻게 하다보니 넷이 모여다녔다. 그때 L은 아직 소년 느낌이 남아있는 앳된 얼굴에 섬세한 말투를 지녔고 S는 쌍거풀 없는 긴 눈에 남다른 패션 감각을 가져서 묘한 분위기를 가졌으며 M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에 큰 키, 선명한 눈동자를 뽐냈다. 그랬던 그들은 이제 이십대 후반이 되어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의복 제작 견습생, 화장품 디자이너로서 일하고, 배우고 있다.


우리는 만나면 되고 싶은 인물 모델이라던가 들어가고 싶은 회사명을 얘기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동시에 기대했던 때였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나서 대부분 현재 진행형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 회사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다시 미래를 걱정하지만 예전과 달리 기대보단 체념 투로 이직이나 기대 연봉에 대해 구체적인 단어나 숫자로 말한다.


반복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런 주제가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한 동시에 아찔해졌다. 현실 감각을 아예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현실 감각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못 보거나 모른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현실 감각이 뛰어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그것에만 몰두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의복 제작 견습생 친구를 뺀 나머지 친구들이 퇴사, 이직, 연봉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딱히 할말이 없었다. 퇴사를 경험담은 지루했고 이직은 학생 때부터 전공 상관없이 이쪽 저쪽을 배회하고 회사원이 되어서도 직종을 넘나들었기에 똑부러지게 정리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 경쟁이 싫어서 시험 기간이 제일 싫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근간에 경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가 더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하며 경력을 쌓고 직급을 달았다면, 연봉이 높았다면 입 다물고 있었을까. 이런 가정이야말로 나란 사람이 강한 경쟁 의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 경쟁 의식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선의의 경쟁이든 어떻든, 경쟁은 나를 피로하게 만든다. 그래서 회사에서 오래 일하고 경력을 쌓고 직급을 달고 연봉이 높더라도 입 다물고 있는 건 똑같았을 것이다.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거대한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을 포기해버린다.


만약 앞으로도 이런 순간이 더 빈번해지면 지금처럼 말하기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이런 순간이 오지 않게 그런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경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바꿔야 하는 걸까. 그런데 왜 경쟁해야 하는거지? 왜 경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거지? 현실적인 단어를 언급하는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찌들었다는 느낌으로 바뀐거지?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텅 빈 피자판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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