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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Sep 18. 2019

대충 살자, 종로의 세븐일레븐 간판처럼


공무원 시험을 막 마친 친구가 서울 노량진역에서 원주로 다시 돌아왔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오랜만에 만나 나눈 인사는 “고생했다, 수고했다”였다. 한동안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친구는 친구대로 근황을 전했고 나는 나대로 어떻게 일상을 보냈는지 얘기했다. 


오랜만에 만나 부딪히는 잔은 흥겨웠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그러다가 나는 친구에게 실은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다들 너무 열심히 산다고, 열심히 산다는 강도를 1부터 10으로 놓았을 때 모두 8, 9강도라고, 그래서 7이나 6으로만 떨어져도 열심히 살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고, 삶을 지속하는 힘의 기준이 지나치게 상향 평준화가 되어 있다고.

그러자 친구는 휴학 한 번 안 하고 각종 대외활동, 인턴십 프로그램을 거쳐 바로 졸업을 하고 시험을 준비 중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취업에 불리할까 졸업 유예를 선택한 동기들을 뒤로하고 졸업을 택했지만 결국 주어진 건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이었고, 쉽사리 불안이 가시지 않더라고.

친구야말로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에는 틈틈이 취미로 수채화를 그렸고 가야금도 연주했다. 외국어를 전공한 덕분에 해외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좋아하는 연예인에게도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자신만 멈춰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춘은 (원래) 아프고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고 싶지만 떡볶이가 먹고 싶다거나 퇴사를 하고 자아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삶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기대는 높아지는 중이다. 문제는 기대를 기준으로 바꿔 개인 모두를 기준에 ‘갈아 만드는’ 사회 분위기에 있다. 경쟁은 당연하고 노력의 강도는 점점 세진다. 이런 경쟁과 노력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최근 인기 프로그램 <캠핑클럽>에서 이효리가 나머지 멤버들을 보며 말했다. 

우린 다 멀쩡한 개개인이야그런데 넷이 모이니깐 비교하게 되잖아한 명은 늦게 일어나는 애한 명은 느린 애한 명은 성질 급한 애그게 문제였어비교.”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사회에서 비교는 숨 쉬듯 자연스럽다. 언제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내내 석차와 백분율을, 사회에서는 스펙과 성과물, 돈을 향한다. 심지어 그러지 말자고 만들어 낸 새로운 대안조차도 결국 경쟁이다. 열심히 살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면 안전망 하나 없는 곳으로 추락할 것만 같은 불안이 만연하다. 


그럴수록 나는 적당히 노력하고 싶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취와 성과물에만 매달리지 않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도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서 필요한 것과 충분한 만족을 얻길 바란다. 

아니, 실은 적당한 노력이고 뭐고 대충 살고 싶다. 눈금 없는 비커처럼, 바람이 반쯤 빠진 튜브처럼, 종로의 어느 세븐일레븐 간판처럼, 때로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모습과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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