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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코크 Jul 15. 2020

아둥바둥 흙수저 탈출기 (1)

내 삶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30대 후반 직장인의 흙수저 탈출기를 써보려 합니다. 


10대에 생긴 돈에 대한 자격지심과 결핍은 30대가 되어서야 치유가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격지심 또는 열등감 혹은 마음속 아킬레스건이 있을 겁니다. 

아직 30대이고 아직 성공은 멀기만 하지만 '자격지심과 결핍'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겪은 고민, 방황, 번민 그리고 깨달음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엄마, 저 태권도장 가고 싶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땐 국민학교였다)

당시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온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았던 나는 학교에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5학년 새 교실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짝지 K는 태권도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인기 있는 친구였다. 


하루는 그 친구K가 태권도장에 같이 다니자고 했다. 같이 태권도장을 다니면 친구K와도 친해지고 싸움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인기 있는 친구에 초대가 반갑기만 했다


그날 오후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욕실에 앉아 빨래를 하고 계신 엄마가 보였다. 

"엄마, 저 태권도장 가고 싶어요!" 


가방도 벗지 않은 채 욕실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에게 얘기 했으나 어쩐 일인지 엄마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묵묵히 빨래를 계속 하셨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그날의 대답 없이 손빨래만 하시던 엄마의 뒷모습과 젖은 빨래의 질퍽질퍽한 소리가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후로 난 학원이 가고 싶거나 운동이 배우고 싶거나 악기가 배우고 싶어도 돈이 드는 것이라면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이는 어렸어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우리집은 그런 돈을 쓸 만큼 여유가 없다는 것을...... 뭘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부모에게 부담이라는 것을......  


아마도 그 즈음부터 나의 돈에 대한 자격지심과 결핍이 시작 되었던 것 같다.  


밥을 굶을 정도로, 학비가 밀릴 정도로 가난하진 않았으나 아버지가 매월 가져오시는 박봉의 월급으로 4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늘 빠듯했기에 어릴 적부터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우리 집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나의 어릴 적 돈에 대한 결핍이 '공부를 잘해서 성공해야겠다'는 마음과 에너지로 이어졌다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대한민국 지방도시의 평범하디 평범한, 그냥 그런 학생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적도 신통찮았고 그렇다고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놀기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너무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3이 되어서야 공부를 좀 해보려 했으나 특별히 머리가 좋지도 않았던 나는 부산의 지방사립대에 '겨우' 진학하였다. 성적이 신통찮았던 나의 수능성적은 충격적이게도 영어성적은 80점 만점에 40점. 수학은 반타작도 하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방대 진학을 한 것도 용하다. 


학창시절 영포자, 수포자였던 나는 대학에 가면 수학은 더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 내심 좋았지만 대학생활은 영어라는 큰 벽을 느끼게 해주었다.  



20살이 되던해 8월의 여름날 밤 나와 같이 락음악을 좋아하던 학과 동기 여사친과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에 락페스티벌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해외에서 온 뮤지션도 있었는데 곡 중간 중간에 해외 뮤지션이 영어로 농담도 하고 설명도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난 알 턱이 없어 멍 때리고 있는데 같이 간 옆 친구는 순간순간 빵빵 터지며 막 웃어대는 게 아닌가? 


저걸 다 알아듣냐고 놀라서 물어보니 그렇단다. 사실 그 친구는 외국어고 출신이었기에 그쯤이야 별것 아니었을 것이다. 

모르면 쪽 팔린다는 생각을 그 때부터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고도 내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아무것도 한 게 없이 여름방학이 끝나간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결심을 하고 열심히 공부를 할 자신도 없었다. 

혼자서는 변할 자신이 없었기에 군대를 좀 빨리 가기로 하고선 이왕 가는 군대, 좀 빡 센 곳에 가서 나를 바꿔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영도 못하고 무술을 했던 것도 아니라 깡다구만 있으면 갈 수 있다는 그곳을 지원했다. 게다가 합격만 하면 3개월만에 갈 수 있다고 하니 20살, 12월에 입대도 가능해 보였다.  


"인간 개조의 용광로"


포항 훈련소에 입소하고 나면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의 무서운 문구가 보인다. 

"해병대는 인간 개조의 용광로!"


병역의무를 마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나 또한 2년간의 담금질을 통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군에서 '공부 잘해서 부러운 놈' 부터 '나보다도 답이 없는 놈'까지 여러 사람을 겪으며 내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커질 때 쯤 20대에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멘토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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