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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Mar 03. 2019

시작과 끝, 블라디보스톡

네덜란드로의 여행_새로운 시작, 그 시작의 끝에서

지극히 평범한 여름날이다.


눈은 시리고

바람은 시원한데

햇볕은 따스한, 그런.


이렇게 푸르고

먹을 것 없고

무료한

도시의 바닷가에

촌스러운 음악이 들린다.


바다를 담으려는 뽀얀 소녀의 피부는

따스한 햇볕에 발갛게 달아올랐고

바다를 담은 갈매기들이 곁에 와 앉았다.


나는

기다릴 이도 없고

기다려 줄 이도 없어

나무 그늘에 앉아 소리를 듣는다.

모래를 간질이는 파도 소리, 속삭이는 나뭇잎 소리, 

어린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


그런 여름날을 지나고 있다.



인천에서 두 시간을 걸려 날아가면 '블라디보스톡'이라는 도시가 있다. 블라디보스톡 에서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떠난다. 러시아 동쪽의 유명 관광지라지만, 시내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30분이 걸릴 까 말까 한다. 누가 여기를 관광지라고 했는지, 볼 데라고는 바다가 전부이고 갈 데라고는 해수욕장이 전부인 곳에 여행객이 많기도 하다. 새벽 1시에 떠날 기차를 기다려, 해가 질 때까지 책을 읽는다. 혹시라도 너무 빨리 읽으면 어쩌나, 한 줄 한 줄 아껴 가며. 

나는 갈 데도 없어, 바닷가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곯아 떨어진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게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


대학생활의 자유는 모든 게 서툴렀다. 돌아온 집에는 더 이상 내 방이 없고, 친구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었다. 바삐 출근하는 가족들을 배웅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낯선 이방인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동대문 행 지하철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운반되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같은 시계바늘에 마음을 싣고 있었다. 외투를 찾아 들어온 시장에서 득달같이 달려드는 호객꾼들은 피해 5분도 안 되어 뛰쳐 나온 낯선 이방인은 도시와 다른 시계바늘 위에 서 있었다.


Attitude is the Difference between an ordeal and an adventure.

태도가 시련과 모험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

 - Bob Bitchin - 


사람들은 시작하는 데 공을 들인다. 좀 더 꼼꼼히, 좀 더 편하게, 빠르게 하기 위해 무던히 준비하고 애를 쓴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격언도 있으니, 시작이 정말 중요하다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라,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은 두렵고 망설여진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 데 대뜸 일의 절반이나 책임을 지우려 드니 지레 겁을 먹는다.


어딘가를 떠나는 것은 시작일까, 아니면 끝일까? 지난 일주일 동안 작별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하고, 하루에 하나씩 옷 가방의 짐을 덜어냈었다. 별 게 없는데도 비우고 내려놓기가 아쉬웠다. 새로운 시작, 그 시작의 끝에는 좀 더 홀가분해져야지.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기다려야겠다.


이번 여행, 왠지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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