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관광을 끝내고 여행을 시작하는 이유
네덜란드의 여름은 녹록하지 않다. 햇빛이 뜨거운 한낮의 광장에 옷을 훌훌 벗었다가 저녁 공기에 감기가 걸려 버린다. 제일 두꺼운 옷을 껴 입고 밤새 끙끙 앓다가, 하룻밤을 꼬박 앓고 나서야 집 앞 카페에 기어 나와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인 덕에, 이렇게 쓰러져 있어도 되는 건 꽤나 괜찮은 행운이다. 마지막 날까지 네덜란드를 조금이라도 더 둘러볼 궁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로워진 셈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더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야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 된 것 같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을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거라면, 어제도 했다. 한국에서도 했다.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저녁거리를 사는 거라면 대학 기숙사에서도 항상 하던 일이다.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매일 새로운 박물관, 새로운 모험, 새로운 음식을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그것도 시큰둥해져 버린다. 네덜란드에 온다고 해서 특별히 무한한 즐길 거리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야경, 미술품을 몇 번 더 본다거나, 몇 장 더 찍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네덜란드의 인상파 미술에 대해서, 렘브란트와 베르미르와 그 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매료되기 위해 애쓰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구글에서 네덜란드를 검색해 보기만 해도 그럴듯한 하루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우리가 찍은 것보다 몇 배는 더 멋진 사진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러한 그림을 몇 백 점을 본다 해도, 수많은 사진을 찍는다 해도, 그것은 ‘진짜 여행’과 같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행은 모험'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어디인가 석연치 않다.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있다면, 여기 온 것이 오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짜 여행은 무엇일까? 유람(遊覽)이나 관광(觀光) 대신에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고, 성장하게 하는, 우리가 '그래, 이 여행은 진짜였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여행은 무엇일까.
네덜란드로 오는 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네덜란드로 오는 길은 불운과 불편의 연속이었다. '남들처럼 유럽에 가고 싶지는 않다'는 객기로 무턱대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탔지만, 영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손짓 발짓으로 꾸역꾸역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다. 그마저도 얼마 못 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오래된 열차칸이라는 99번 열차칸에서 생활하다 보면, 좁은 복도를 지나가려다 파블로 아저씨와 툭 튀어나온 배를 서로 맞대어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열차에서의 시간은, 러시아의 오두막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온 것과 같았다. 평소라면 비행기를 타고, 손바닥 만 한 창문으로 굽어보며 지나갔을 무수히 많은 오두막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 온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마이스키 홍차를 두 잔씩 마시고, 비에라 할머니와 짜디 짠 소시지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었다. 할머니의 손녀인 발리나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오리온 초코파이를 사 두고, 이따금 무심하게 슬쩍 건네주고는 했다. 기차가 정차할 때면 이번 역에서는 노점상에서 뭘 먹을 수 있을까, 지난 역에서는 산딸기를 팔았는데, 하면서 그저 먹을 생각뿐이었다.
비행기는 현실에 없는 공간, 가도 가도 고요한 하늘을 지난다. 9시간의 꿈속을 지나면 전혀 다른 세계를 눈 앞에 보여준다. 기차는 179시간짜리 현실을 달리는 운송 수단이었다. 비행기 표값보다도 웃돈을 얹어 주어야 하고, 일주일 동안 서너 명의 이웃들과 같은 방을 사용하며 함께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런 여행이야말로, 네덜란드에 도착해 지냈던 어떤 날들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아직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네어 예 브네 겐(No Fish Day) 카페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점원에게 이끌려 망고 라테를 네 잔이나 마셨고, Gina 할머니를 만났던 비로비잔, 메트뵈 신부님이 정교회 성당을 짓는다던 톰스크를 여전히 기억한다. 우즈베키스탄과 독일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는 이끄롬 삼촌을 만나 러시아 인사말을 배웠고, 여자 친구와 피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일리야와 승무원 몰래 보드카를 마시며 키로프를 지나왔다. Kostroma에 내린 니콜라이 아저씨를 배웅하다가 격한 포옹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던 그날 새벽도, 열차가 지나온 도시들과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도 추억한다.
낭만적이지 않은 여행, 가도 가도 평원밖에 없었던 지루하기 짝이 없던 여행, 그런 여행이 화려한 네덜란드의 풍경보다 더욱 강렬하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행은 익숙한 각본에서 벗어나 우리를 낯선 이들의 이야기에 밀어 넣는다. 그들의 낯선 이야기에는 풍경, 자연, 문화, 이웃과 같이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새롭다. 꼭 두근거리고, 설레고, 행복으로 가득하지만은 않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러시아 아저씨들이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소시지를 잘라 주며 씩 웃을 때에는 고맙기보다도 얼른 칼을 내려놓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두려움이든, 설렘이든, 정(情)이든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어떤 자국을 남긴다.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남긴다. 떠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곳에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다. 어떤 곳에 갈 때, 자신을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 간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
어떤 사람은 모스크바의 화려함을 '아름답다'라고 기억하지만, 또 다른 이는 '차갑다'라고 이야기한다. 레닌 도서관을 '지루하다'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희끗희끗한 머리를 넘기며 책에 열중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도 더러 있다. 암스테르담을 '쾌락의 도시'로 기억하는 이가 있는 가 하면, '맑은 자연 속의 자유'로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이처럼 여행지에 대한 느낌과 교감은 사람마다 다르다.
"실제 들판의 푸름보다 그 묘사가 더 푸르다." 누군가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칭찬했는데, 난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될 거라고 했죠.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
어쩌면 우리는 두 눈으로 각각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하나는 우리 앞에 놓인 풍경을 바라보지만 다른 하나는 기억 뒤편에 남겨질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가 기억하고 묘사하는 풍경은 종종 그것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우리의 일부를 드러낸다. 풍경을 인식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짜 여행을 느낀다. 진짜 여행은 익숙한 이야기의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 속에서 만나는 것들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는 과정이 아닐까. 돌아보면, 우리가 '이게 진짜다'라고 느꼈던 여행들은 모두 이런 과정이 있는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는 프라도가 했던 대로 낯선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이 낯선 시선을 자기 안에서 만들고, 그런 시선에서 나온 자기 모습을 자기 안에 받아들였다. 이제 막 만난 이방인처럼..."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
그렇다면, 왜 하필 여행일까? 어째서 여행은 우리를 뒤바꿔 놓을까?
모든 생물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며, 적응하고, 진화한다. 따라서 다른 환경이나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존의 조건들은 생물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길러 낸다. 예를 들어, 식물의 '굴광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물의 줄기는 빛이 오는 방향으로 굽어 자라며, 뿌리는 빛의 반대 방향으로 굽어 자란다. 따라서 똑같은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온 씨앗들이라 하더라도,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이 있느냐, 혹은 넓은 들판에 있느냐에 따라 식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다만 식물과 달리 우리의 모양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고, 햇볕처럼 늘 곁에 있어 그 영향을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다.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갖추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생각과 능력은 여행지에서 살아가며 필요로 하는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켰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게 될 까?
'좋은 여행'을 바라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를 변화하고 성장하게 하는 여행은 꼭 우리가 예측한 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경험의 범주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동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의 울타리 밖에 있는 바깥에 있는 것이라야만 우리가 익숙한 울타리 속 세상을 빠져나와 울타리 밖의 것을 관찰하고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작은 울타리에 있던 나'로부터 '그 울타리 바깥의 나'로 경험의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된다.
사람은 여행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여행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이므로,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대상이 주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리에게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여행이 바로 이런 여행들이었다.
여행자는 자신의 개성과 능력에 맞는 여행의 방식을 찾아서, 그 방식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재인식하게 된다. 여행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은 무수히 많다. 그중 우리들만의 방식을 통해 느끼고 깨닫는 것들만이 우리 몫으로 남겨지는 것 같다.
우리가 바라본 네덜란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네덜란드에서의 시간은 우리를 어떻게 바꿔 놓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