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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Mar 17. 2019

스물 셋, 우리들의 이야기

에필로그


네덜란드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어느 술자리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스물 셋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누군가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누군가는 몇 년의 대학 생활을 더 남겨두고 있었으며, 저마다 취준생이나 로스쿨 입시생 같은 정해진 자리로 돌아갈 날을 앞두고 있었다. 그 곳에서 Hanna 라는 예술대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예술과 같은 창작활동이 인간과 기계, 혹은 동물이 구분될 수 있는 고유의 특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그런데 최근에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가 발달하면서 이마저도 더 이상 특별한 의의를 가지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인간의 것과 차이가 없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지? 우리는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일까?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확실하다. 누군가는 그 정해진 것 없음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부러워한다. 세상의 주인공은 너희들이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재능과 패기 같은 것들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혹은 그네들보다 외형적으로나마 더 나은 환경에 태어났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네들조차 이미 따라 잡기를 포기해 버린 변화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적응해야 살 수 있다는 조바심과 더불어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함께 느낀다. 스스로를 지우고 이 사회에 동화되려다가 제 색깔을 잃어버리는 가 하면, 스스로를 지키려 고집 부리는 스물 셋 젊음에게 좀처럼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우리의 존재조차 흐려지는 것을 경험한다. 당장 유행이 달라지고, 새로 배워야 하는 기술이 달라지고, 유망 직종이 달라지는데 우리들만의 색깔이니, 존재니 하는 것들을 하소연하는 것도 어느 새 배부른 소리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무엇이냐고? 요즘 좀 여유로워지더니 별 생각을 다 하는구나.


우리는, 모름지기 사람은 많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고 이야기한다. 세계를 몇 바퀴 돌았다는 사람도, 저 멀리 성지순례를 다녀 왔다는 사람도, 혹은 그 혹독함에 저절로 연민과 존경심이 샘솟는 어르신들의 옛날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의 연장선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경험의 양은 그 자체로 성장을 보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각각의 경우에 자신의 실재성이 단지 양적으로 증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실재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서, 더 높아지고 더 깊어지기를 원한다. - 로버트 노직,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 


우리는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그러한 과정과, 그 과정을 지나 온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한다. 그러지 못하면 수많은 경험과 깨달음도 하룻밤에 잊혀지고 마는 반 쪽짜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우리 자신의 영혼의 조각들이라도 조심히 주워모을 수 있어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믿을 수 없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서 최소한 우리 자신은 꽤 잘 아는, 그나마 믿을만 한 것이어야 한다. 잘 안 다는 것은,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는 각각의 길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하나의 큰 물줄기로, 크고 작은 깨달음을 그 안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바로 이해(理解)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책 <마크툽>을 쓰게 된 일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가브리엘은 1899년 꿈에서 천사를 보았다. 천사는 그에게 말했다. "깨진 유리 조각들로 집 한 채를 지어라." 꿈에서 깨어난 뒤 가브리엘은 깨진 타일 조각, 접시, 실내 장식품, 유리병들을 모아 집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아름다움을 이룬다오." 

... 93세에 그는 마지막 유리 조각을 쌓았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가브리엘이 꿈에서 천사를 보고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집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행자는 자신의 영적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모은 삶의 조각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나도 그런 책을 써야 해."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도 글로 정리해야 했다. 수많은 삶의 퍼즐들이 모여 어떤 전경을 빚어내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을 글로 써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경험들과, 수많은 밤들을,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또렷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유럽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 또한 '스물 셋, 우리들' 이기에 가능하다면, 나와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묻고, 글로 정리했다. 이 이야기는 그 결과물이다.


며칠 전, 한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그는 문득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하고 말했다. 내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혹은 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 '맞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라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러고 보면 '글'은 쓰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경험하는 이야기를 맛있게 정리해 놓은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조금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지나가는 생각들이 단단히 붙들려 보관되지만, 어떤 사람의 머리에서는 다른 생각들에 의해 뒤로 밀려나 흐릿해진다. 그리고는 옆에서 누군가 다시 알려 주기 전까지 까맣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누군가 삶에서 중요한 질문에 부딪혔을 때, '자, 이제 진지한 대화를 해 보자'라고 제안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답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으니까.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흘려 버린 답은 누가 운 좋게 주여준다 한들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 테니, 우리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답은 값싸게 얻으려는 사람의 품에서는 시들어 버리고, 마음으로 씨앗을 품어 주는 사람에게서 스스로 피어나지 않던가.


우리의 이야기를 되짚어 따라가다 보면, 때때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가끔은 '마치 키보드로 똥을 누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고는 했다. 영감으로 가득 차 호기롭게 글을 시작했지만, 이내 말도 안 되는 글을 끄적이다 보면 그런 마음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와, 이건 너무 창피해. 저건 말도 안 돼. 차라리 관둘 까, 관두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똥을 누게 되는 것 같다. 사람보다 정교한 기계조차 몇 퍼센트의 확률로 불량품을 찍어내는데, 그보다 불완전하고 미숙한 사람의 불량률이야 말해 무엇할까. 모든 작업이 완벽한 결과만을 낼 수는 없기에, 일부는 기대에 못 미치는 부산물을 생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 있으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건강한 생각을 하며, 맛 좋은 언어로 표현하고, 가끔은 거울 앞에 서서 예전보다 건강해진 모습에 성취감을 느끼기를 바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개똥 같은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개똥 같은 시행 착오가 두려워 살아 있기를, 온전한 삶을 되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함께하는 우리들이 욕심에 사로잡혀 무리하다가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부족한 솜씨에 좌절하지 않고, 오늘은 더 멋지게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즐거웠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고 어딘가에서, 무언가에 푹 빠진 우리들의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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